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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들

하나님이여(시편 139편)

하나님이여!!”

시편 13917-24

<역지사지>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봄.

오늘 시편 기자는 자신의 처지가 아닌 하나님의 입장에서 주의 생각을 헤아려보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17-18)

마치 바둑의 고수가 앞을 내다보며 한수 두수 세수를 보듯이 그리고 하나님의 수를 헤아려 보다가 결국 돌을 던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이 말씀을 가지고 한 분이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미련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거 원어상으로 잘못된 해석 아닙니까? 아무리 원어를 보고, 영어성경을 봐도 하나님의 어리석음,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있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단어의 표현보다는 그 의미에 집중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표적을 구하고 지혜를 구하는 고린도교회에 너희가 아무리 날고 뛰고 해도 하나님에게는 안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좀 과격하지만, 이런 표현을 한 것입니다.

오늘 시편기자도 주의 생각을 헤아려 볼 때 도저히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주님의 생각이 얼마나 보배롭고 많은지 알 수가 없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예수님을 봐도 그렇습니다. 곁에서 늘 따라다니던 제자들조차도 주님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고 산으로 홀연히 떠나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보고 갑자기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을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상종해서는 안될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남들은 죄인이라고 피하는 이들에게 친구가 되어주시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문둥병자와 각색 병든 자들을 만지시고, 다가가 고치시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주의 생각은 이처럼 헤아릴 수 없는 보배와 같습니다. 그 놀라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다는 것 자체가 이해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생각 너머에 계신 분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삶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왜 우리에게 이런 일들이 생길까?! 건강에 이상이 생기고, 시험에 들 때도 있고, 안좋은 일이 계속 생길 때도 있습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가축들을 도둑맡고, 재산이 날라가고, 자녀들을 한순간에 잃어버리고, 자신의 건강까지도 잃어버렸습니다. 아내도 떠나가고 친하다는 세 친구는 와서는 오히려 욥을 비난하고 정죄하기 까지 합니다. 욥은 결국에 하나님 앞에 한낱 티끌밖에 안되는 자신을 깨닫고, 주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42:5-6)

우리에게도 욥과 같은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재산있다고 으스대다가 한 순간에 날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 자랑하던 자식에게 어느날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생각을 내려놓고 전적으로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게 지혜로운 것이고, 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3918절에서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도 이러한 주님을 알았습니다.

사무엘하 729절 말씀

이제 청컨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할렐루야! 오늘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한 것이 축복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주님을 알게 되면, 다른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시편기자는 참으로 미워하는 원수같은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면서 주여~ 주여~ 하듯이, 하나님이여~ 여호와여~ 하나님이여~ 계속해서 부릅니다. 19절에서 21절에서 23절에서 계속 하나님이여~ 여호와여~ 부릅니다.

정말 저 밉고 미운 원수같은 자,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 그런 무리가 있었습니다.

22절에 내가 저희를 심히 미워하니 저희는 나의 원수니이다

누구나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며느리는 시어머니에 관해서 그렇습니다. 시댁을 가는데도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만약 시어머니가 집에 오신다고 하면, 집에 온통 난리가 납니다. 밀렸던 청소, 빨래, 냉장고까지 깔끔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말 한마디 툭 던지고 가면, 속이 뒤집어져서 헤어나오질 못합니다. 자꾸 미워하는 감정이 생깁니다.

그리고 악독한 자들, 사기꾼들이 그렇게 밉습니다. 남 속여서 배 떵떵거리고 사는 모습을 보면 속이 뒤틀립니다. 미워하는 자가 정치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꾸 미워하다보면 하는 모든 짓이 미워보입니다. 상종하기도 싫습니다. 폰에서 번호도 지우고, 수신거부도 해놓습니다. 어떤 며느리가 인터넷 카페에 글을 올렸는데 폰에 시어머니라고 저장을 해놨는데 시어머니가 아시고, 어머님으로 바꾸라고 말했다며 마음을 토로 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친정엄마는 사랑하는 마미~ 하트뿅뿅!! 이렇게 저장해놓는데 시어머니는 이름만 써서 000, 또는 신랑엄마라고 써놓았다는 글도 보았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기란 싶지가 않습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내 마음가지고, 내 생각가지고는 할 수 없습니다. 새벽기도 끝나고 은혜받고 집에 갔는데 그 잘난 시어머니가 딱 눈에 들어오면 은혜고 뭐고 없지 않습니까?!

시편기자는 솔직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아룁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23-24)

우리 하나님께 아뢰고, 우리가 잘못된 길에 있다면, 얼른 고쳐주셔서 영원한 길로 인도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을 사모하셔서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변화받고, 새사람되어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매맞고, 핍박받고, 감옥에 갇혀도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상황은 변하지 않습니다. 환경은 변하지 않습니다. 시어머니는 변하지 않습니다. 원수는 계속해서 괴롭힙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변할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 받으면 변합니다. 은혜받으면 변합니다. 계속해서 기도하면 변합니다.

믿음으로 선포하면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으면 변할 수 있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말씀으로 나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 지혜로우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길 원합니다. 늘 주님과 함께하는 축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주님. 사람이 미워질 때가 있고, 싫어질 때가 있습니다. 성령충만을 주셔서 나의 감정과 기분대로가 아닌 주님의 뜻과 마음으로 품을 수 있는 사랑을 주옵소서. 우리를 위해 십자기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