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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들

예수님의 이름으로(삼하 12장)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무엘하 1226-31

 

성경을 읽을 때 예전에는 몇 독했느냐? 얼마나 읽었느냐에 초점을 맞춰서 읽을 때가 있었습니다. 1년에 몇 독을 해야지 목표를 정하고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다보니, 얼마나 읽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 한절을 읽더라도 거기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 말씀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1년에 몇 독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에서 은혜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새벽기도회 나온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자리에 나와서 은혜받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오늘 이 자리가 은혜받는 자리가 되길 축복합니다.

지난 주에 생활하면서 문득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누리는 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 모든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 감동이 없고, 은혜가 없고, 감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밥 먹는 것, 예배 드리는 것, 말씀 듣는 것, 그냥 늘상 당연히 하는 것이기에 감사가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북한에서 이러한 일을 한다고 생각해보십시다. 흰 쌀밥 먹는 것, 마음껏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말씀을 듣는 것, 얼마나 감격스러울까요?! 얼마나 특별할까요? 죽을 뻔 하다가 살아난 사람들을 보면, 인생의 소중한 것을 깨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7,80년대에는 유명한 목사님들이 폐병을 앓아서 죽다가 살아나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도 그랬고, 구약신학자 김정준 목사님도 그랬습니다. 죽음 앞에 하나님이 살려주셔서 더 크게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인생은 누구를 붙들고 사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됩니다.

오늘은 군대장관 요압을 보면서 하나님 말씀 나누겠습니다.

 

1) 누구의 이름으로 취하는가(26-28)

요압은 스루야의 아들로 다윗왕 때 군대장관을 맡았습니다. 헷사람 우리아를 죽게 만든 것도 요압이었습니다. 요압은 어쩌면 다윗을 너무나 잘 알아서 그 머리 위에서 자신의 안녕과 번영을 추구했던 사람 같습니다. 처세술의 달인입니다.

암몬과의 전투에 있어서 이제 암몬이란 나라의 수도 랍바를 점령을 코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전과를 올리고, 명예를 드높이기보다 모든 영광은 다윗에게 돌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 26-28

요압이 암몬 자손의 왕성 랍바를 쳐서 취하게 되매 사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가로되 내가 랍바 곧 물들의 성을 쳐서 취하게 되었으니 이제 왕은 남은 군사를 모아 진치고 이 성을 쳐서 취하소서 내가 이 성을 취하면 이 성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려워하나이다

요압은 모든 공을 다윗에게 돌립니다. 다윗의 이름을 높이고 자신은 철저히 그 뒤에 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들 암논을 죽인 압살롬을 다시 데려오는것도 사실 다윗의 마음을 읽고서 요압이 행한 일입니다. (삼하 14:1), 요압은 압살롬의 반역사건을 진압하고 압살롬을 처형해버립니다. 전쟁에는 승리했지만, 다윗이 부탁하고 당부한 것을 져버린 것입니다. 세바의 난을 제압한 것도 요압이었고, 후에 다윗이 저지른 인구조사의 죄에 대해서 반대한 것도 요압이었습니다. 이러한 요압은 수많은 공을 세우고,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결국 다윗의 말년에 줄을 잘못서서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솔로몬과 아도니야 중에서 아도니야의 편에 가담한 것입니다.

요압의 일생을 보면서, 처음에는 왕에게 충성했지만, 가면 갈수록 더 다윗과 반대되는 길을 걸어가다가 결국 죽음을 맞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무엘하에 나오는 요압은 충성스러운 장군의 모습입니다.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도록 보낸 편지가 증거가 있고, 그 우리아 사건을 다 알고 있음에도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고, 모든 전쟁의 공적을 다윗에게 돌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다윗의 생각과는 반대로 행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요압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처음에 신앙생활할 때는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고 순종적이었지만,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나 자신의 경험과 생각대로 하려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가 중요합니다. 요압은 처음에는 하나님 믿던 다윗의 편에 섰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편에 서버려서 말년에 씁쓸하게 죽게 됩니다. 우리는 일평생 주님의 편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하루를 살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에 우리의 마음을 쏟기를 원합니다.

요압은 랍바라는 성을 취할 때 자기의 이름으로 취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그 자리를 양보합니다. 그래서 다윗의 이름으로 그 성을 점령하게 됩니다.

다윗이 그 성을 자신의 이름으로 점령하긴 했지만, 사실 누구의 이름으로 점령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점령한 것입니다. 다윗의 죄고백 이후에 하나님이 다윗을 살려주시고, 그 랍바 성까지 점령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의 이름으로 행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타락할 때는 좋은 일에는 우리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 안좋은 일을 할 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거룩할 때는 좋은 일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안좋은 일에 내 자신의 이름으로 했다고 고백할 때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이름으로 행하며 살고 있습니까? 영광스러운 일에 하나님보다 나의 이름을 앞세우지 않습니까?

 

2) 면류관을 취한 다윗(29-31)

오늘 말씀의 하반절을 보면 다윗이 암몬 왕의 머리에서 보석이 있는 면류관을 취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면류관의 중량이 금 한달란트나 된다고 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한달란트의 중량은 34kg이나 된다고 합니다. 다윗이 그 금 한달란트를 썼다고 성경에 나오는데 얼마나 휘황찬란하고, 그 무게가 엄청났는지를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무거운 면류관을 쓰고 생활이나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만큼 명예와 권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한 목사님이 목회자들에게 설교에 관해서 이야기 하는 글에서 이런 내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성경 어디를 펴서 읽든지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오늘 읽은 말씀 가운데 단 한단어인 면류관이란 글을 읽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려야 합니다. 비록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한 전리품으로 보석이 있는 면류관을 취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거기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 면류관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 현시대는 다윗처럼 보석이 박힌 금면류관을 쓰려고 안달나 있지는 않나 생각이 듭니다. 더 잘살고, 더 부하고, 더 편하고, 더 즐기고, 더 휘황찬란한 것들만을 꿈꾸며 살려고 합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 면류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머리에 박혀 피흘리며 고통 가운데 우리를 보시는 그 예수님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위해 피흘리시고, 나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신 그 분을 떠올려야 합니다.

가시 면류관은 철저히 고난입니다. 영광과는 거리가 멉니다. 가시 면류관은 아픔입니다. 명예와는 거리가 멉니다. 가시면류관은 순종입니다. 반항과 혈기와는 거리가 멉니다. 가시면류관은 포기입니다. 눈에 불을 켜고 움켜쥐려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가시 면류관은 낮아짐입니다. 높아지려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가시면류관은 자발적인 겸손입니다. 자신의 의를 드러낸 교만과는 거리가 멉니다.

다윗은 금 면류관을 쓰며 많은 영토를 얻고, 노예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시 면류관을 쓰며 온 세계를 얻었고, 몇 억명이나 되는 인류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누구나 벗어버리고 싶고, 쓰고 싶지 않은 가시면류관이지만, 나 한사람의 헌신과 희생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새생명 얻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헨리 나우웬이 말한 것처럼 작은 예수가 되라는 것입니다.”작은 예수..

우리 신앙의 가장 큰 목표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고, 작은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가시면류관처럼 아픔, 고난, 순종, 포기, 낮아짐, 겸손의 순간이 우리에게 닥칠지 모릅니다. 그 때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처럼 좋고 영광스러운 일에는 나 자신의 이름보다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길 원합니다. 가시 면류관이란 단어 하나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며 예수님 닮기를 원합니다. 오늘 하루도 작은 예수로 살아나길 간절히 원합니다. 주님! 여기 모인 한 분 한 분을 축복하여 주시고, 주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귀한 하루를 살게 하옵소서.

가시 면류관을 쓰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