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들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누가복음 1장)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믿음의 기대)”

누가복음 157-66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자녀에 대해 거는 기대가 있습니다.

부모는 자기 자식들을 보면 어렸을 때는 보통 천재아니면 영재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 애들을 보면서 하는 이야기가 큰 누나는 누나 아들이 어렸을 때 책을 쌓아놓고 읽길래 나중에 커서 뭐라도 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모는 누구나 자기 자식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우리 아들은.. 우리 딸은.. 다르겠지 하는 은근한 기대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녀가 점점 커가면서 평범해지거나 보통 아이들 보다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내려놓음이라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은 세례 요한의 출생이야기 속에서 믿음의 기대에 관해서 하나님 말씀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읽어보니까 계속 반복되어지는 단어가 바로 이름입니다.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팔일이 되어 할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을 짓는데 다른 많은 친족과 이웃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서 사가랴 라고 짓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 아이의 어머니는 분명하게 No! 아니오! 하고 요한이라고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159-60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팔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그 모친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모친이 너무 분명하고 단호하게 이름을 요한이라고 말하자 주변 사람들이 관례에 따라 친족 중에 요한이라고 이름한 사람이 없는데 무슨 소리냐? 하고 반문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아이의 부친 사가랴에게 묻습니다. 여기에는 은근히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서 사가랴라고 짓는데 설마 부친인 사가랴가 반대할까 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르게 사가랴도 서판에 그 이름은 요한이라고 씁니다.

거기 모인 친족들과 이웃들은 다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저는 이 모습을 상상해 보면서 세례 요한에 관한 이야기 이지만, 예수님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이름을 짓는데 이웃과 친족들 많은 이들은 다른 이름을 이야기 합니다. 원래 그랬다고.. 친족 중에 그런 이름이 없다고.. 많은 근거와 주장을 펼칩니다.

하지만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너무도 분명한 이름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그 이름이 요한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사가랴라고 하자고 했을 때 단호하고 분명하게 no~ 아니오~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름이 있습니다. 이 이름 외에는 다른 이름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든 불교든 힌두교든 종교 하나 제대로 믿으면 돼~

진리는 등산하는 것과 같아서 등산로만 다르지 어차피 다 정상에서 만나게 되어 있어~

아무 종교나 믿으면 돼~

~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명한 이름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이름 앞에 타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오래 믿다보면 어느새 우리에게 슬며시 자리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적당히~ 예수 믿자는 적당주의입니다.

예배드리는 것도 주일예배 한번이면 됐지~ 뭘 매일 예배를 드려~ 생활도 해야하고, 먹고 살아야 하니까 적당히 예수 믿어야지~ 광신자 되면 안돼~!!

이 정도면 되겠다 할 때 적당주의가 슬며시 우리의 마음 속에 파고듭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적당히 타협하면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새벽기도 나왔으니까 됐어~ 적당히 20분 정도 기도하다가 가~”

제가 사역을 수년 동안 하다보니까 저도 모르게 제 안에 싹트는 것이 이 적당주의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만 하면 되겠지~ 제 스스로가 적당히 타협합니다. 좀 더 편하려고 하고, 좀 더 쉴려고 하고, 다른 사람이랑 좀 잘지내보려고 믿음은 슬며시 뒷전으로 밀어놓습니다. 직분은 가면 벗듯이 벗어놓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직장에서, 세상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적당주의가 틈탈 때 마다 No~!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좋게 좋게~ 하자고 할 때 원칙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고,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이름 빼면 아무것도 남는게 없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1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잠깐 돌이켜 보십시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예수 이름으로 한다면, 적당히 할 수 있습니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루에 얼마나 남 비판하고, 판단하고, 깎아 내리고, 험담하기를 좋아합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말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이름으로 그 말을 한다면 그렇게 남 비판하고, 험담하고, 헐뜯을 수 있습니까?!

첫째는 우리가 누구의 이름으로 믿음 생활하고, 누구의 이름을 붙잡고 살아야 하는 지 잊지 마시고, 예수 이름을 생각했을 때 아니다 싶은 것은 단호하게 노~ 할 줄 아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가랴가 천사의 말에 순종하자, 벙어리처럼 막혀버린 말과 혀가 풀리게 되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이러한 세례 요한의 출생이야기를 듣고 듣는 사람 모두가 다 이 이야기를 마음에 두고 이야기 했습니다.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주의 손이 저와 함께 하심이라..

누가복음 165-66절 같이 읽겠습니다.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매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가로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니 이는 주의 손이 저와 함께 하심이러라

사람들은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기대했습니다. 주의 손이 저와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하면 그 아이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요셉이 형통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직 팔일밖에 되지 않는 아이 지만, 그 아이의 출생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궁금해하고 기대했습니다. 주의 손이 저와 함께 하는데 과연 그 인생이 어떻게 될까 기대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믿음의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이 요셉을 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았고, 감옥 간수장이 요셉을 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았듯이 뭇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이 붙드심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충성되이 여겨 주셨습니다.

디모데 전서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전에는 훼방자요 포행자였던 사도 바울에게 사도라는 직분을 주심은 그를 충성되이 여기고 바울을 향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우리를 주의 성전으로 부른 것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기대가 있기 때문에 부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예수 이름으로 행하고 예수 이름으로 말하는 믿음을 주옵시고, 시간이 갈수록 적당히 예수 믿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믿음의 사람들 되게 하시고, 뭇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장차 어찌될지 기대할 만한 그러한 그리스도인들 다 되게 하옵소서.

감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