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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들

욥의 대답(욥기 6장)

욥의 대답

욥기 61~ 13

욥기를 읽을 때 우리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숲과 나무를 보듯이, 전체적인 숲을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욥기는 총 42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2장은 서론,

3장부터 426절까지는 세 친구들(엘리바스, 빌닷, 소발)과의 대화와 하나님의 개입, 그리고 마지막으로 42:7-17절까지는 결론입니다.

욥의 주요 내용은 세 친구들과의 대화가 세편에 걸쳐서 나옵니다. 그 중에 어제는 5장에서 엘리바스의 충고를 들었습니다. 엘리바스는 세 친구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연륜과 경험에 의지해서 욥에게 충고하고 책망합니다.

그 중심 논리는 인과응보입니다. 너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래 믿음생활하는 사람일수록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 뜻보다도 우리의 경험과 우리의 생각을 의지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경험을 뛰어넘습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인간적인 편견과 환경을 뛰어넘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그 엘리바스의 충고에 대한 욥의 대답입니다. 얼마나 이 답이 문학적인지 모릅니다.

62-3절 말씀을 제가 새번역으로 읽어드립니다.

, 내가 겪은 고난을 모두 저울에 달아 볼 수 있고, 내가 당하는 고통을 모두 저울에 올릴 수 있다면, 틀림없이 바다의 모래보다 더 무거울 것이니 내 말이 거칠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바다의 모래보다 더 무거운 고통과 고난을 겪었다고 표현합니다. 자신의 상황을 정말 문학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표현 양식을 보면, 뭐 거의 울부짖음입니다.

들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나의 기력이 어찌 돌의 기력이겠느냐? 나의 살이 어찌 놋쇠겠느냐?

엘리바스에게 울부짖으며 따지는 듯한 말투입니다. 어떻게 친구로서 내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지 분하다는 말투입니다.

그런데 엘리바스의 말을 보면요, 이것은 위로가 아니라 충고입니다.

몸에 악창이나고, 재산이며 자녀들 다 잃어버린 사람에게 위로는커녕 충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볼장 다 보고, 잃을 것 다 잃은 사람에게 충고하는 것은 두 번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욥이 울부짖으며 항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의 모습도 이와 같습니다.

뭔가 실수를 하면 우리는 위로하고 격려하기 보다는 곧잘 충고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실수를 해서 재산을 날렸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찾아와서 그러게 왜 그랬어~ 그냥 만족하며 살지~ 왜 그랬어? 이러면 속이 부글부글 끌어오릅니다.

하지만 정말 참된 위로는 안아주고, 다독여주고, 아픔을 나누는데 있습니다.

충고와 위로의 다른 점이 있다면 충고는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래 있는 사람에게 가르치듯 훈계하는 것이라면, 위로는 똑같은 위치에서 안아주고, 나누고, 함께 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자녀들의 실수나 우리 가족들의 실수, 내 주변의 실수를 대할 때 우리가 충고가 아닌 위로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지만, 충고는 모든 감정을 더 상하게 만듭니다.

성령을 뜻하는 말이 파라클레토스인데 이 말 뜻은 위로자를 뜻합니다.

혹시 어려움 가운데 있는 분이 있다면 위로자 되시는 성령님께서 함께해주심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는, 엘리바스의 충고에 의해 욥은 항변하듯 울부짖으며 자신의 고난을 토로했다는 것입니다. 충고가 아닌 위로의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 구절은 610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할찌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무정한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욥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앞에 떳떳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일한 위로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61-13절을 계속해서 읽는데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말씀 속에서 깨우칠 수 있는 것은

욥이 고난 가운데서도 늘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4절에서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8절에서 하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얻게 하시며

10절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13절까지 4번 정도 하나님에 관해 나옵니다.

이것은 욥이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늘 의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언제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식하게 될까요? 여러분은 언제 전능자의 손길을 체험하게 됩니까?

정말 하는 일이 다 잘되고, 행복하고, 감사가 넘치고, 사업이 대박났을 때 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깨닫게 됩니까? 아니면 생각지도 못한 고난을 당하고, 내 몸이 질병으로 인해 약해지고, 사업에 어려움이 생기고, 자녀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 그 때에야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게 됩니까?

안타깝게도 사람이 간사해서 그런지 어려움이 생길 때에야 하나님을 더 의식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더 찾게 됩니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행복이라는 선물을 고난의 보자기에 싸서 주신다.”

성경 속에서도 특별히 이스라엘민족이 새롭게 되어질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바벨론 포로기 때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가서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되는데 그제서야 전능하신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우상을 섬기고 했던 지난날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하고, 가르치며 다시 일어서는 거에요. 믿음을 회복하고 돌아와서 성전을 다시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이 에스라, 느헤미야에 나옵니다.

우리가 살면서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욥처럼 내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어리석어서 그런지 하나님께 귀한 은혜를 받아서 건강이 회복되고, 사업이 잘되고, 귀한 자녀를 얻게 되었을 때는 신앙생활을 잘 합니다. 그런데 그게 한 두달 가면 잊혀지는 거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단히 기도하고 말씀읽고, 예배를 드려야하는 것입니다.

왜 날마다 새벽을 깨웁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을 의식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그 은혜 아래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