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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들

요한복음 1장 43~51절 설교(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에

요한복음 143~51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는데 146절에서 나다나엘은 빌립의 말을 듣고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몇 마디 나누고 나서 49절에서는 나다나엘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처음에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냐고 따지던 나다나엘이 어떻게 나사렛 사람 예수를 보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고백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단 몇 마디 말을 통해 예수님에 관해서 나다나엘은 이렇듯 다르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그 중심에는 알 수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나다나엘이 참 이스라엘 사람이고,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 예수님이 알아주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은 빌립이 부르기도 전에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는 나다나엘을 보셨다는 사실입니다.

셋째는 나다나엘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더 큰 일을 보리라고 약속해주십니다.

이 세 가지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나다나엘처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는 선입견이 바뀌어지고 이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모시는 놀라운 변화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나다나엘은 참 이스라엘 사람 - 간사한 것이 없도다!

오늘 본문 47절과 51절 말씀을 읽다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누가 생각나십니까? 이스라엘은 누구의 이름입니까? “야곱의 이름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얻은 새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따라서 나다나엘은 야곱과 같은 간사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간절히 믿고 의지하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야곱은 천성이 그 이름처럼 간사한 사람이었습니다.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나 간사하게 누군가를 속이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형 에서를 속이고,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외삼촌 라반을 속여서 자신의 재산을 늘렸습니다. 천성적으로 사기꾼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 야곱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야곱이 창세기 32장에서 하나님 만나고 간사한 자에서 진실한 사람인 이스라엘로 바뀌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이 보시기에 나다나엘은 참으로 진실한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한번도 본 적 없었지만,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 주님이 우리 마음을 보시면 무엇이라고 하실까요?

우리를 참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야곱처럼 간사한 자라고 할까요?

인간은 누구나 간사한 데가 있습니다. 인간은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간사한데가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일평생 한번도 거짓말 해본적이 없다는 분이 있으면 손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세운 평양 대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요구했던 가장 큰 방침은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는 말이었습니다. 미국에 가서 처음에는 청결을 강조하고, 서양인과의 교섭과 거래에서 결코 거짓말을 하지 말고 무슨 일이 있어도 신용을 지킬 것을 역설했습니다. 특히 서양인들에게 다음 세 가지를 심어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인의 상점에서는 안심하고 물건을 살 수 있다한국인의 노동자는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다

한국인의 언약이라면 믿을 수 있다한국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상점에서는 안심하고 물건을 살 수 있다그리스도인의 노동자는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언약이라면 믿을 수 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믿음을 입증하고, 예수 믿는 사람은 거짓이 없다는 것을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디모데후서 13-5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얼마나 디모데를 보고 기뻐하는 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기뻐합니까?

그 이유는 5절에 나오는 거짓이 없는 믿음 때문입니다.

거짓없이 믿음 생활하는 디모데를 보면 사도 바울이 기쁘기 때문에 디모데를 더 보고 디모데를 생각할 때 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거짓 없는 믿음이 있어야 겠습니다.

나다나엘이 참이스라엘 사람임을 우리 주님은 이미 알아보셨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의 마음도 감찰하시고, 우리의 깊은 속까지 들여다 보십니다. 두렵지 않으십니까?! 주님 앞에 거짓없는 믿음으로 사십시다!

가끔 보면, 누가 보지 않더라도, 은밀하게 주의 일을 감당하고, 선행을 하시는 분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한 분들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불이익이 있더라도 주님을 위해 희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온갖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예배의 자리를 빠지지 않고 사모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남모를 아픔, 고민, 걱정 속에서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신 분들이 있습니다. 남들은 원래 그랬다면서 거짓을 밥먹듯이 하지만 나만은 정직하리라 하는 각오로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가게에 가서 만원을 내고 거스름돈을 받았는데 오천원이 아닌 오만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외치겠습니까? 아니면 돌아가서 오천원을 잘못 거슬러줬다고 말하겠습니까? 아마도 땡잡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사실 정직은 용기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덕목입니다. 그러한 정직한 분들을 알아봐주시고, 인정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인정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아무개야, 힘들지? 그래도 너야 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인정해 주십니다. 정직이라는 용기는 모든 사람들이 몰라도 우리 하나님만은 알아주신다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참으로 주여~ 주여~ 하면서 뒤돌아서서 거짓말하는 이들이 되지 맙시다! 주여~ 주여~ 하면서 간사하게 살지 맙시다! 주님께서는 나다나엘처럼 진실한 자를 알아보십니다. 그리고 참으로 이스라엘사람이라고 칭찬해주십니다. 이러한 진실한 자, 정직한 자, 우리 주님께 칭찬받는 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오늘 말씀 48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고 했습니다. 나다나엘이 무엇 때문에 무화과 나무 아래에 갔을까요?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인정한 것은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기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이스라엘은 무더운 지방이라 방 안은 무척 덥기 때문에 사람들은 낮에는 흔히 무화과 나무 아래서 쉬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조용히 묵상하였습니다. 로마의 압제에 있는 나라를 위해, 그리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메시야를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나다나엘은 조용히 혼자서 하나님께 나가는 무화과 나무 아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나다나엘을 특별히 주목하셨습니다. 남몰래 시간을 내어서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기도할 때, 그의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은 특별히 그 사람을 주목하십니다.

무화과 나무 아래는 그가 하나님을 특별히 찾고 있는 시간이요, 하나님과 교제하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고 인정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바로 무화과 나무 아래입니다.

에이든 토저 목사님이 한 깊이 있는 말이 있습니다.

단순과 고독을 기르자. 날마다 세상을 떠나 은밀한 장소로 들어가라 침실이라도 좋다. 주위의 소음들이 당신의 마음에서 희미해지고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의식이 뒤덮을 때까지 그 은밀한 곳에 머물라. 당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음성에 귀를 기울여 그것을 식별하라. 매순간 내적으로 기도하는 법을 배우라. 영원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응시하라.”

왜 우리가 새벽마다, 날마다 이 자리에 나와 우리의 내면 속에 울리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까?

바로 이 시간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자리가 영원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응시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성전이 무화과 나무 아래요 하나님 앞에 잠잠히 엎드릴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는 말에 너무 놀라서 예수님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하고 외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은밀하게 기도하는 자신을 너무도 분명하게 꿰뚫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남몰래 홀로 거룩한 고독 속에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에 특별히 우리를 주목해주십니다.

지금의 세상은 우리를 너무 분주하게 만듭니다. 현대인은 늘 소음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동차소리, 음악소리, 시끄러운 소리.. 그럴 때일수록 잠잠히 무화과 나무 아래로 달려가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루에 십분이라도 말씀 앞에 서십시오.

하루에 단 십분이라도 십자가를 묵상하십시오. 하루에 단 십분이라도 영원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응시하십시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대면할 때에 그의 옹졸한 성경지식이 깨어졌습니다. 그의 알고 있던 신앙경험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이제껏 자신이 알았던 모든 관념과 고집과 인격이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외쳤던 그 입술에서

나사렛 예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하는 놀라운 고백이 터져나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고백이 우리의 입술에도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도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 내가 보았노라 하는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개야, 너야말로 거짓이 없는 믿음의 사람이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주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150-51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 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더 큰 일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더 큰 기적과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종종 하십니다.

너희 믿음대로 될찌어다!”

열두해 혈루병 걸린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맹인 바디매오에게도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더 큰 일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예수님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되는 축복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 이루시는 기적,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 맨처음 1장에 나온 나다나엘은 요한복음 맨 마지막장인 21장에서 또 한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차려주신 조반을 먹는 그 자리에서 부활의 신비를 경험합니다. 예수님의 더 큰 일을 보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지금은 작고 연약하고,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예수님이 물으시는 그 물음 피스튜에이스 네가 믿느냐?” 그 믿음에 내가 믿습니다 응답하는 모든 분들에게 예수님께서 더 큰 일을 보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진실한 사람, 참 이스라엘처럼 신실한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나다나엘처럼 무화과 나무 아래 자주 자주 가시기를 바랍니다.

단순과 고독을 기르시고, 영원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응시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날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볼 수 있는 큰 영광을 보여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