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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들

느헤미야 1장 1~11절 설교(느헤미야의 기도)

느헤미야의 기도

느헤미야 11~11

우리에게 주어진 많은 것들을 당연히 여기면 감사도 없고, 은혜도 없고 삶이 무의미해져 버립니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많은 것들을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것으로 여긴다면, 감사가 넘치고, 은혜가 넘치고, 얼마나 가치가 있고, 기쁨이 충만한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에 참석했다는 것 자체가 감사요. 은혜가 되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느헤미야입니다. 느헤미야 시대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후 바사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도록 스룹바벨과 예수아, 학개, 에스라가 포로에서 귀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닥사스다왕 때에 3차로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해서 성벽과 성문을 세우는 일이 기록된 것이 느헤미야서입니다.

느헤미야는 거룩한 직분을 가진 제사장도, 선지자도, 레위지파도 아닌평신도였습니다. 그는 바사의 수도 수산궁에서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원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었고, 왕의 신임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왕이 먹고 마시기에 음식과 술이 안전한 지를 확인하는 것이 느헤미야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왕과 매우 가까운 자리에 있기 때문에 개인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왕과 신하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개인적인 이득이나 좋은 자리보다도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부르셨습니다. 궁궐에서의 안락함을 뒤로한 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성문을 보수하는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도록 느헤미야를 부르셨고, 느헤미야는 기꺼이 그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 한 사람을 통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큰 일을 이루시는 이 일 가운데서 우리에게 신앙적으로 많은 교훈과 도전을 줍니다. 오늘 그러한 은혜를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자기 죄로, 하나님의 일을 자기 일로 여기라.

느헤미야는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도록 징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원했습니다. 그의 형제 하나니를 통해 들은 내용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인들의 목전에서 능욕을 당하고 있고,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들은 불에 탔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소식을 듣고 앉아서 울며 수일 동안 슬퍼했습니다. 그는 왕궁에서 안락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동족들의 어려움을 자신의 일처럼 느끼며 슬피 울었습니다. 그는 그건 그 사람들의 사정이야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그 사람들은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다음에 갈 때 내게 미리 알려주면 돈이나 옷가지들을 좀 보내도록 할께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느헤미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큰 환란을 마치 자기 자신에게 닥친 큰 환란처럼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13-7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성벽이 무너지고, 무시당하고, 슬픔을 당하는 그 모든 일이 남의 일이 아닌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느헤미야의 믿음의 자세입니다.

가만히 한번 보십시오. 누가 성전건축헌금을 합니까? 돈의 액수나 크기가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만나는 거룩한 성전을 짓는다 생각하는 이들이 헌금을 합니다. 아주 작더라도 성전을 향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사정이 어려운 분들은 새벽을 깨우며 기도하고, 몸으로라도 봉사하는 것을 봅니다. 성전건축이 남의 일이 아닌 자신의 일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이 내 일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변에 어려움 당한 이들이 내 가족이라는 마음으로 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전건축하는 이 일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일이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길 바랍니다. 옆에 계신 분이 내 어머니요, 아버지요, 내 딸이요, 아들이라면 더 기도해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느헤미야는 그러한 마음 가짐으로 이스라엘의 아픔과 환란을 대했기에 몇날 몇일을 슬피울며 금식하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내 민족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한국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내가 사는 이 지역 일원동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내 교회를 위해 울어야 합니다. 내 순모임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내 가정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 가운데 또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어떠한 영광과 일의 성공, 장점과 잘난 것들을 자기의 것으로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느헤미야는 반대로 이스라엘의 범죄를 자기의 죄로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6절 말씀입니다.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앞서 말했듯이 느헤미야는 평신도입니다. 일반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큰 환란은 리더의 문제야, 목회자의 문제야, 순장의 문제야, 라고 치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낮고 누가 생각하지도 않는 성도로서 자기의 죄로 여기고 자복하고 통회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에는 다 자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범죄를 저지른 그 일이 자기 죄 때문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가 위기라고 합니다. 교회가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고, 개척교회가 문을 닫고 있고, 예전에는 대학교가면 아이들이 교회를 떠난다고했는데 이제는 중학교만 가도 교회를 떠난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누구를 탓해야 합니까? 어른들을 탓해야 합니까? 리더를 탓해야 합니까?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이들을 탓해야 합니까?

느헤미야는 자기의 죄 때문이라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죄로 인해 한국교회가 위기입니다. 나의 죄로 인해 순 모임이 위기입니다. 나의 죄로 인해 가정이 위기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있다면, 아직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는 줄 믿습니다. 느헤미야처럼 자기 죄를 깨닫고 인식하고, 이제 민족을 위해 자기 자신을 드리는 헌신이 일어난다면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듯이 우리 한국교회도 일어나고 다락방이 살아나고, 가정이 살아날 줄 믿습니다. 한사람이 무슨 일을 얼마나 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한다면, 느헤미야를 기억하십시오. 느헤미야 한 사람의 결단과 헌신으로 예루살렘 성벽과 성문이 재건되었습니다. 여기 모인 분들 중 단 한사람이라도 하나님 말씀 듣고 결단하고, 헌신한다면 느헤미야와 같은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교사로, 순장으로, 성도로 회개하고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던진다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은혜가 임하길 축복합니다.

느헤미야는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라!

느헤미야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크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느헤미야 15절에보니까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1:5)라고 기도합니다. 느헤미야서에는 기도가 열두차례 기록되어 있다. 기도하면서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크신 하나님,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414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932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하심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느헤미야는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했습니다. 바사의 왕 앞에 아뢰기 전에도 하나님께 먼저 기도했습니다. 왜냐하면 왕보다 더 크신 이가 하나님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크신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현재의 안락함을 뒤로한 채 어려운 곳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느헤미야서를 보면 기도하는 기간을 알 수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아닥사스다 왕 제 이십년 기슬르월에 하나니에게 그 소식을 들었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금식하고 기도하였고, 21절에 보면 아닥사스다 왕 이십년 니산월에 왕의 앞에 나아간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기슬르월은 유대력으로 보면 9월을 가르키고 니산월은 1월을 가르킵니다. 9월에서 1월까지를 계산하면 몇 개월을 기도했습니까?

(4개월) 동안 기도하고 왕 앞에 나아간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24절에서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왕에게 고하되

왕의 물음을 받고도 바로 즉답하는 것이 아니라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상으로 기도하는 느헤미야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왕이 묻는데 그 앞에서 기도하고 답하는 것입니다.

사실 느헤미야를 읽어보면 말씀 곳곳에서 기도하는 느헤미야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산발랏, 도비야, 게셈이 방해공작을 할 때도 47-9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성이 중수되어 그 허물어진 틈이 메꾸어져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노하여 다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치고 그곳을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들로 말미암아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느헤미야가 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놀라운 일을 이룰 수 있었을까? 말씀을 보면, 느헤미야는 문제가 생기면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이는 문제목표에서 눈을 뗄 때 보게 되는 난처한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온전히 예루살렘 성벽과 성문을 재건이라는 목표에 시선을 고정했습니다.

사실 그에게 닥친 문제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첫 번째 문제는 기존의 사람들과의 차이점을 극복하는 것(동기부여)이었습니다. 이미 귀환하고 있던 사람들, 끌려가지 않고 남아있던 사람들, 성벽과 성문 없이도 생활하고 있고, 이미 상황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과 자신과의 생각의 차이를 극복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내적인 문제, 다시금 성벽을 세우고자하는 동기를 일으키는 것이 첫 번째 문제였습니다. 꼭 뭐 해보자고 하면 안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해봤는데 안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나안 정탐을 하고 와서는, 우리는 메뚜기 같다고 하는 사람들이 12명 중에 10명이나 됩니다. 안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냥 잘 지내고 있는데 왜 하냐는 것입니다. 그냥 이대로 지내면 되지 뭐 힘들게 고생할 필요가 있냐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영적으로 절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성벽과 성문은 안을 지키고 밖에서 침입하는 것을 대적하기 위한 것인데, 무장해제된 상태로는 아무것도 지킬 수도 없고,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느헤미야가 뜻을 세우고 기도하자, 하나님은 그에게 하나님을 위해 함께 일할 동역자들을 붙여 주셨습니다.

두 번째 문제로는 이스라엘 밖에서 일을 방해하는 세력(외적 방해)이 나타난 것입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은 유대인들이 복구 활동을 하는 것은 왕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을 조롱하며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유대인들은 기도하면서 일을 쉬지 않고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그 세 사람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악한사람들 특징이 대체로 끈질기고 집요합니다. 그들은 더 많은 사람들을 모아서 예루살렘을 공격할 것이라고 위협을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대책으로 사람들을 무장시켜 성문을 지키게 했습니다. 한 손에는 창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했습니다. 주의 일을 하는데 쉬지 않은 것입니다.

문제는 늘 또 다른 문제를 가져오기 마련입니다. 원수들의 외적인 공격이 조용하자 이번에는 또 내적인 문제(내적 갈등)가 생겨났습니다. 일꾼들 가운데 낙심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고, 가난한 유대인들이 도움을 청했습니다. 빈부의 격차로 인한 갈등이 있었고, 기근이 시작되어 먹고 사는 문제도 녹록치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러한 문제들도 기도하면서 정면돌파 합니다. 부자들을 혼내고, 동족들을 착취한 것을 돌려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것을 먼저 내어 놓았습니다. 자기가 먼저 솔선수범해서 가진 것을 나눈 것입니다. 그러자 내부적인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이렇듯 느헤미야 앞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에 사실 문제가 없다면 진전도 없습니다. 영적인 진통이 있어야 성장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결코 죽은 자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를 공격하는 사탄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셨다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 물리쳐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크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사실 이 자리에 영적으로 살려고 나온 것 아닙니까?! 산다는 것은 뜨거운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크신 하나님께 뜨겁게 간구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느헤미야는 큰 희생을 감수하고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 안락한 왕의 술관원이라는 자리를 내려놓았습니다. 성벽재건 공사를 하며 사람들과 함께 밤낮으로 일했고, 그 어떤 총독이라는 특권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총독에게 할당된 음식을 먹는 대신 그는 음식값을 지불했고, 자신의 식탁에서 150명의 사람들을 먹게 했습니다. 먼저 희생하고 그 희생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모범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그 말씀을 입증하셨습니다. 생명을 던져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희생한 것이 무엇이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었는데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한 책에 보니까 영적인 영향력을 점검하는 기준이 다섯가지가 나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1) 개종: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통해 개종하고 있는가?

2) 회개: 예수 믿으면서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이 나를 통해 얼마나 회개하고 돌아서는가?

3) 변화: 삶의 변화를 입증할 만한 분명한 증거가 나에게 있는가?

4) 성숙: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얼마나 성숙해 가고 있는가?

5) 헌신: 나를 통해 변화 받은 사람이 얼마나 헌신하고 있는가?

오늘 느헤미야를 통해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한번 되돌아보는 귀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참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손에 잡히는 것은 없고, 삶에 변화는 없고, 눈에 보여지는 것이 없습니다. 내가 제대로 가고 있나?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가? 속시원하게 예, 아니오로 명확하게 답변이 왔으면 좋겠는데 그렇지가 않는거에요. 기도는 하는데 왜 답변이 없을꼬? 기도는 한다고 하는데 왜 삶에 변화가 없을꼬? 그 이유가 무엇인지 돌아보면, 우리의 삶에 행함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임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영향력을 점검하는데 첫 번째, 개종.. 전도를 안하는데 어떻게 개종을 시킬수 있습니까? 나부터가 하나님 앞에 눈물쏟으며 통회하지 않는데 누구를 회개시킬 수 있습니까? 세 번째 변화.. 내가 하나님 앞에서 변하려고 몸부림치지 않는데 어떻게 삶의 변화가 있겠습니까? 네 번째 성숙.. 성숙을 위해

그 어떤 투자도 안하는데 무슨 성장이 있겠습니까? 다섯 번째 헌신..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와 수고가 없이 어떻게 같이 헌신하자고 같이 봉사하자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느헤미야서는 13장밖에 안됩니다. 처음에는 큰 환란으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큰 기쁨으로 끝이 납니다. 그 이유는 크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52일만에 성벽재건 작업을 마칠 수 있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은 예루살렘이 처한 곤경에 대해, 문제에 대해 남의 일이 아닌 자기일이라고 생각한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의 기도 중에 참 눈에 들어오는 두 구절이 있습니다.

519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1331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느헤미야를 기억하시고 복을 주셨듯이, 우리도 하나님께 기억되는 귀한 축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