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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들

누가복음 18장 35~ 19장 10절 설교(소경과 삭개오)

소경과 삭개오

누가복음 1835~1910

<축복언어>란 책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음악회가 끝난 뒤 피아노를 조율하는 일은 없습니다. 연주회 시작 전에 조율을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 당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조율하십시오.”피아노 조율에는 기본음이 있습니다. 인생 조율에도 기본 틀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신앙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제멋대로 말하고 처신하지만, 신앙인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틀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조율사일수록 탁월한 청음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확한 조율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삶을 곧고 바르게 조율하려면 소리 들음이 뛰어나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조율된 삶은 말쑥하고 정갈하지만 조율 안된 삶은 거칠기 짝이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인생을 조율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소경과 삭개오 두 사람의 구원 이야기를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예수님이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입니다.

소경은 여리고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는 눈먼 거지였습니다. 그 때 한 무리가 지나가는 것을 듣게 됩니다.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소경은 분명히 나사렛 예수라고 들었는데, 들은 대로 말하지 않고,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이미 나사렛 예수 이외에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을 듣고, 알고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소경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소경은 평생에 한번 올까 말까한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예수님을 부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앞서 가는 자들이 시끄럽다고 잠잠하라고 꾸짖습니다. 소경은 더욱 크게 소리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경의 외침이 예수님께 들렸습니다. 예수님이 저를 데려오라 하시고, 묻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대답합니다.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여기서 주여는 원어로 퀴리에를 뜻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가 소경과 만났을 때 소경에게 예수님은 주님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소경이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갖으면서 일어나게 된 사실입니다. 인격적인 만남 이전에는 다윗의 자손이었지만, 만남 이후에는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않았을 때는 우리 모두 눈먼 소경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저와 여러분도 주님을 주님 되게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소경의 평생의 소원은 아마 한번이라도 보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경에게 선포합니다.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소경은 구원의 감격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삭개오 이야기의 공간적인 배경은 여리고에 들어 지나갈 때였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부자였습니다. 예수님이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 싶었는데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었습니다. 미리 앞으로 달려가 뽕나무에 올라갑니다. 예수님은 그런 삭개오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 거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합니다. 주위 사람들은 수군거렸고, 삭개오는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여기서 주여라고 말할 때, 소경이 불렀던 것처럼 퀴리에라고 호칭합니다. 예수님이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했는데.. 그 예수님이 퀴리에..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포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선포는 삭개오에게는 놀라운 구원이었습니다. 이제껏 많은 사람들이 매국노라고, 세리장이라고, 뒤에서 손가락질하고, 인간취급도 안하고 따돌림 당했는데.. 예수님은 삭개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인정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혹시 누군가에게 인정받아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때의 기분은 참 말로 형용할 수 조차 없습니다. 너무 기쁘고 가슴이 벅찹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에게 인정받고, 위로받는 것도 기쁘고 감격스러운데.. 우리 하나님께 위로받고 인정받는 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삭개오도 예수님께 인정받았을 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 충만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향한 구원 선포 이후에 10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오신 이유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경과 삭개오 이야기는 이 구원이라는 큰 주제 아래 하나의 이야기로 연관지어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두 사람의 다른 점을 보면,

소경은 구걸하는 거지였고, 삭개오는 부자였습니다. 소경은 길바닥에 주저 앉아서 생활하는 사람이었고, 삭개오는 돌무화과나무에 높이 올라갔던 것처럼 높은 지위, 부요한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소경은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삭개오는 볼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소경은 여리고 밖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삭개오는 여리고 안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각자의 구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도 달랐습니다.

소경의 구원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했지만, 삭개오의 구원을 보고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이 하신 일은 마땅하기도 하지만, 이해 안되는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구원은 우리의 볼 수 있는 것 너머에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5절에 보면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소경과 삭개오의 닮은 점 또한 몇 가지가 있습니다.

소경과 삭개오는 둘 다 죄인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소경이 눈먼 것은 나면서 부터든지, 그 부모의 죄로든지,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여겼고, 삭개오는 매국노 세리장으로서 동족들의 세금을 갈취해서 부자가 된 것이라고 죄인 취급 받았습니다.

소경과 삭개오는 둘 다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습니다 신체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과 키가 작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똑같이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무언가를 시도합니다. 소경은 말할 수 있는 입으로 최대한 큰 목소리로 예수님을 부르는 것이었고, 삭개오는 작은 키를 극복하기 위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것입니다.

저는 소경이 예수님 한번 보기 위해 사람들 의식하지 않고 큰 목소리로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부자이고 세리장이었던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부자이며 세리의 장이었던 삭개오가 나무를 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거지는 체면도 없지만, 삭개오는 돈 많은 부자로서 얼마나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고 체면을 차리고 다녔겠습니까?! 근데 그 삭개오가 예수님을 한번 보겠다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 겁니다. 소경과 삭개오는 예수님을 통해 이처럼 각자의 상황에서 최대한 자신들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소경과 삭개오는 공간적으로 예수님과 멀찍이 떨어져 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소경을 가까이 데려오라고 명했고, 삭개오에게는 속히 내려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간적으로 거리가 있었는데 예수님께 가까워진 것입니다. 이전에는 소경과 삭개오에게 그냥 예수님이었다면, 이제는 퀴리에..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김춘수 시인의 이란 시에 나오는 것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우리 주님이 소경과 삭개오를 부를 때 그들은 주님의 꽃이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이 선포하신 구원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기도 하셨지만, 이 땅위에서 가난하고 소외받고 병든 자들을 위한 구원, 소경의 개인구원(육신의 건강)과 삭개오의 사회구원(사회적 지위, 민족 동질성 회복)을 포함하고 계심을 깨닫습니다.

헬라어 원어를 보면 소경이 구원받았다는 것은 소조의 과거완료형인 세소켄입니다. 이것은 온전한 구원인데, 육체적인 치료와 더불어 영적인 구원을 뜻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천국시민이 된다는 것 뿐만이 아니라 이 땅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치료받고, 회복되고, 온전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소경처럼 보지 못하는 자가 보게 되는 것이 구원이고, 삭개오처럼 매국노라고 비난 받는 이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인정해주는 것이 구원입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고, 고통과 질병으로 신음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우리 예수님 만남을 통해 참된 구원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천국,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이 땅에서의 구원도 얼마나 중요한 지 모릅니다. 지금 여러분 가운데 어려운 문제가운데 있으십니까?! 오늘 들은 소경과 삭개오가 주님을 통해 구원받은 것처럼 구원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 전에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소경과 삭개오가 어떻게 구원받게 되었는가 돌이켜보면, 단순하게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보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그 마음과 열정이 있었기에 마침내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소경이 될 수 있고, 삭개오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그 마음과 열정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만나주십니다.

정말 무언가를 간절히 하고 싶은 사람은요. 어떻게 해서든 그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뭐라도 하고 싶은 게 있으십니까? 이것만은 꼭 이루겠다는 비전이나 목표가 있습니까? 신앙 안에서 말씀 안에서 무언가 해야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면, 소경처럼 예수님을 부르짖으십시오! 삭개오처럼 체면이고, 나이고, 다 내려놓고 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럼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 구원해주십니다.

1910절에 소경과 삭개오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왔는지 말씀해주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한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과 열정, 그 구원의 간절함이 우리 가운데 임해서, 우리의 삶 속에서 구원받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구원을 노래하십시오.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과의 첫사랑이 회복되는 귀한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