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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들

눈치 대왕, 다윗(삼하 12장)

눈치 빠른 사람, 다윗

<사무엘하 1219-25

 

1) 눈치 빠른 다윗(19-20)

눈치가 빠르다는 것은 분위기에 민감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영적인 민감함이 필요합니다. 울어야할 때 울고, 웃어야 할 때 웃어야 합니다. 가끔 보면 눈치가 무딘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나게 찬양해야할 때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고, 찬양을 부르자는 건지 마는 건지 모릅니다.

아내가 오랜만에 요리를 해주면, 요리를 먹으면서 이야~ 최고다 최고! 히트다 히트~ 막 이러면서 맛있게 먹어줘야 하는데, 아내가 해준 요리는 안먹고, 시어머니가 보내준 김치만 먹으면 어떻게 될까요? 다음부터 아내가 요리를 할까요? 안할까요?

남편이 평일에 기념일도 아닌데 선물을 사가지고 집에 들어와서 아내한테 줍니다. 아내는 왠일이야 하면서 선물을 풀어봅니다. 그리고 한마디 합니다. 이거 내가 좋아하는 메이커가 아니네, 사이즈도 틀리고, 몇 년을 살았는데 내 취향도 모르면 어떻게 해??

남편이 다음부터 선물을 살까요? 안살까요? 고맙다고 껴안아주고, 우리 남편 밖에 없다면서 감동의 눈물을 펑펑 흘려야 할 상황인데, 남편의 마음을 읽는 눈치가 없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힘들게 공부하고 집에 들어옵니다. 신발은 내 던지고, 방으로 바로 쾅하며 들어갑니다. 엄마가 뒤따라 들어가며 너 무슨 일이냐?! 시험 망쳤어? 왜 말을 못해?

자녀가 그럴 때는 그냥 혼자 두는 것이 좋습니다. 눈치 없이 쫓아가서 속 뒤집어 놓기 보다는 짧은 메모나 격려의 메시지를 적어서 마음을 건내는 것이 좋습니다.

고생했어~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는 널 믿는다! 힘내~”

 

눈치 빠른 사람은 상황을 보는 눈이 있습니다. 시대를 읽는 눈이 있습니다. 그에 따른 대처를 재빠르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신복들의 서로 수군거리는 모습을 보고 바로 아이의 죽음을 직감했습니다. 그러한 눈치와 민감함이 다윗에게는 있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민감해야 합니다. 상황을 읽고, 시대를 읽는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전에 못살 때는 오히려 이런 문제가 덜했는데 근대에 잘살게 되면서 자살문제가 사회에 만연해 있습니다.

그런데 2016년 보건복지부 중앙심리부검센터 분석에 따르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의 93%는 가족, 친구 등 주변인들에게 자신은 곧 자살할 것이라는 자살 전조징후를 보이는 것을 나타났습니다. 두가지 신호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언어적 신호이고, 또 하나는 행동적 변화로 신호를 보낸다고 합니다.

언어적 신호에는

1. 주변사람에게 죽고싶다는 표현을 자주합니다. ‘더이상 사는 의미가 없어’ ‘탈출구는 죽음뿐이야’,

2. 사후 세계를 동경하는 말을 합니다.

천국은 어떤 곳일까? 거기 가면 편하겠지

3. 자신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말합니다.

먼저 가있을테니 잘 지내라, 죽으면 어차피 끝이다.’

4. 심한 절망감이나 무기력감을 호소합니다.

나는 이제 가망이 없어, 아무것도 하기 싫어

5. 자기 비하적인 표현을 자주 합니다.

내가 없어지는 것이 훨씬 낫다,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

두 번째로 행동적인 변화는

1. 농약이나 번개탄 등 자살에 쓰일만한 도구를 물색하거나 구입합니다.

2. 가족과 특별한 시간을 보내려고하거나 이번부터 하고싶었던 말들을 몰아서 합니다.

3. 현금, 계좌 등 재산을 주변인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의 방과 물건들을 정리합니다.

4. , 담배, 폭식 등 좋지 않은 습관을 절제없이 저지릅니다.

5. 일상 생활에서 흥미와 즐거움을 상실하고 활기가 없어집니다.

6. 대인 관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고립되며 일상적인 대화조차도 회피합니다.

7. 감정기복이 심해지며 극도의 불안 혹은 공격적인 성향을 보입니다.

 

이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 몇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1. 자살 도구를 스스로 버리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2. 주변에 상황을 전파하고 혼자 두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3. 자살 의사를 직접적으로 물어보고 왜 자살하려고 하는지 물어봐야 합니다.

4. 전문기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사실, 눈치는 곧 관심입니다. 다윗이 기도하고 금식하면서도 아이의 상황에 대해서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단번에 그 상황을 꿰뚫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관심을 갖고 있고, 우리의 눈을 두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혹자는 좀 전에 이야기 한것처럼 자살을 기도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러한 것들을 눈치채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생명을 살리는 길입니다.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그 문제를 직시해야 합니다. 그 문제에 답이 있고, 그 의도를 알아야 대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민감해야 하는데 무디어져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을 들을 때 은혜가 안된다면, 자신을 한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말씀 전하는 그 사람 자체를 보고 있지는 않는지, 그냥 말씀을 자기 기준에서 판단만 하고 있지는 않는지,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그 곁가지에만 웃고 반응하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감정과 경험에 따라 말씀을 받아들이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솔로몬 (24-25)

오늘 말씀 24-25절 같이 읽겠습니다.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다윗이 밧세바를 통해 두 번째 아기를 낳았는데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지었습니다. 솔로몬은, 우리가 늘 인사하는 샬롬”“평안이란 어원에서 나온 말입니다. 다윗이 마음 아프고, 힘들었던 아이의 죽음 이후에 평안을 얼마나 사모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솔로몬을 사랑하셔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그 이름을 알려주십니다.

여디디야 하나님께 사랑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름을 지어준 이들이 성경에 나옵니다.

구약에서 보면, 아브람-> 아브라함, 사래 -> 사라, 야곱 -> 이스라엘

누가복음에 보면, 세례 요한이 나오고, 예수님 이름도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축복하시면서 새롭게 이름을 지어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솔로몬을 보면서, 하나님이 이 솔로몬처럼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예수 믿고 신앙생활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 땅 가운데 삶이 끝이 아니요, 영원한 하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기에 얼마나 감사합니까? 사실 깨닫지 못해서 그렇지 우리 주변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모릅니다. 때에 따라 양식을 주시고, 건강주시고, 가족주시고, 친구주시고, 천지만물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에도 주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믿으십니까?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 답게 행하며 살아가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은 자들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 답게 행하며 살게 하시고, 영적인 민감함을 주셔서 눈치껏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들을 행하며,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는 귀한 생명의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