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들

아브라함과 롯(창세기 19장)

아브라함의 중보와 은혜를 기억한 롯

창세기 191~ 11

성경을 읽다보면 좋은 의미든지 나쁜 의미든지 그것을 대표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대명사라고 하는데, 믿음의 조상하면 아브라함, 고난의 대명사하면 욥, 배신의 대명사 가룟 유다, 이방인의 사도 바울, 예수님이 나신 곳 베들레헴, 다윗의 도성하면 시온산 예루살렘, 뭐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나오는 도시는 멸망의 도시입니다. 어디인가요?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멸망의 대명사입니다.

우리는 이 땅 가운데 살면서 다른 어떠한 것보다도 믿음의 대명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창세기 19장은 이야기 흐름 속에서 봐야합니다. 19장만 보면, 소돔과 롯이 나오고 소돔을 멸망시키기 위해 온 두 천사가 나옵니다.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갑자기 온 것이 아닙니다. 그 두 천사는 이미 아브라함에게 들렸다가 오는 길이었습니다.

창세기 18장에서 보면,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한명이 아닌 세명이 나타납니다. 18장의 주요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세 명의 손님을 아브라함이 영접하고 대접하는 장면입니다. 발씻을 물을 갖고 오고, 떡과 송아지 요리와 우유를 갖고 옵니다. 이 모든 것은 미리 준비된 게 아니라 급히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사라에게 아들을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사라는 그 때 나이가 많아 늙고 경수는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세 번째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러 가는데 이 때 아브라함이 중보기도를 하는 내용입니다. 의인 오십에서 열명만 의인이 있어도 그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나님께 받아냅니다. 한번에 그런 허락을 받은게 아니라 일곱 번에 걸쳐서 50명에서 10명까지 다운시켰습니다. 얼마나 중보기도를 열심히 했는지 모릅니다. 마치 내게 무슨 큰 일이 일어난 것처럼 일곱 번이나 하나님께 구하고 또 구하면서... 왜 그랬을까요? 왜 자신이 거하는 도시가 아닌데도 그렇게 했나요? 거기에는 조카 롯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창세기 14장에서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동맹한 왕들에게 롯은 포로로 끌려가다가 아브라함을 통해 구원을 얻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수하의 318명의 사람을 이끌고 단까지 쫓아가서 롯과 재물과 인민과 부녀를 다 구해주었습니다.

그 때는 사람의 손에서 구하는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하나님의 심판의 손에서 구해야 하기에 칼과 무기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중보기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요, 돈과 힘으로 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한계와 부족을 깨닫는 게 바로 우리 가까이 있는 자식들, 가족들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자녀들 온전히 양육할 수 있습니까? 돈과 힘만으로 됩니까?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중보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01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쓴 <염소의 축제>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위대한 상징이 된 작품인데요. 거기에 도미니카 공화국의 각하요 독재자인 트루히요 시 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엄청난 권력의 소유자이고, 많은 재산을 가졌지만, 그 독재자가 어찌하지 못한 인물이 자신의 아들입니다. 젊은 아들에게 별을 달아주어 장군을 시키고, 최고의 교육을 시켜도 그 아들은 탕자처럼 타락해서 사고만 치고 다닙니다. 엄청난 돈을 탕진하고, 술과 마약에 쩔어 삽니다. 트루히요 시 앞에서는 다들 벌벌 떨 정도의 권력을 갖고 있고, 많은 재산을 갖고 있어도 자식 하나만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에요.

이게 우리 인간입니다. 이러한 무력함 앞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새벽에 나와서 하는 기도는 거의 똑같습니다. 자식기도, 사업기도, 건강기도 이 영역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으면 방법이 없는 거에요. 아브라함이 중보하니까 의인 롯과 그 가족이 생명을 얻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 1절에서 3절까지 읽겠습니다.

“1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2 가로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가로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경야 하리라

3 롯이 간청하매 그제야 돌이켜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 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롯은 두 천사를 영접합니다. 그런데 그 장소가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영접했다고 나옵니다. 성문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 롯은 그 도시의 유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 도시의 유지가 되었을까요? 14장에서 롯 때문에 소돔 사람들과 부녀들이 목숨을 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찌보면 아브라함의 영향력이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돔의 유지 롯은 그 두 천사에게 간청해서 자신의 집으로 맞아들입니다. 그런데 별안간 소돔 사람들이 그 집을 찾아옵니다.

4-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4절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5절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젊은이든지 노인이든지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쌌습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을 상관하리라고 말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주석을 보니까요. 소돔의 죄악이 어찌나 심했는지 동성애가 판을 쳤다고 나옵니다. 그 두사람을 상관한다는 말은 남자들이 남자들을 범하겠다는 말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롯이 아직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는 두 딸을 내어준다고 해도 소용 없습니다.

그러면서 소돔백성들이 롯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9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가로되 너는 물러나라 또 가로되 이 놈이 들어와서 우거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나아와서 그 문을 깨치려 하는지라

이놈이 들어와서 우거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라고 나오는데..

새번역 성경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이 사람이 자기도 나그네살이를 하는 주제에, 우리에게 재판관 행세를 하려고 하는구나! 어디 그들보다 당신이 먼저 혼 좀 나 보시오

롯이 성문에 앉아 있을 만큼 소돔의 유지가 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이 되자, 사람들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롯은 그 소돔의 유지가 아닌 나그네살이 하는 주제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람들은 겉으로는 롯을 유지로 대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이해타산 앞에서는, 속으로는 나그네살이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롯이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들의 생명을 구해주고, 재산을 구해준 아브라함의 조카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금세 잊어버리고, 도시의 어른이 아닌 나그네처럼 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왜 불과 유황으로 심판을 받았는 지는 그 내용이 자세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동성애 문제나 여러 가지 윤리적인 죄악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소돔 백성들의 태도를 보면, 이들이 얼마나 은혜를 모르는 백성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은혜를 져버리는 것도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롯과 소돔백성의 큰 차이는 그 두 천사를 대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롯은 정성을 다해 주인을 섬기듯 그 두 천사를 대했고, 소돔백성은 그 두 천사를 범하고, 해하려 했습니다. 롯은 엘람 왕으로부터 구원받은 은혜를 기억했고, 자신이 나그네살이 했던 때를 기억해서 나그네들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하지만 소돔 백성들은 무론 노소하고, 예전에 자신들을 구해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무시하고, 조롱하며, 나그네로 대접할 뿐만 아니라, 그 방문한 두 천사에게 죄를 저지르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소돔 백성은 은혜를 모르는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믿는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은혜 없이 지금의 우리가 있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 혹시 스스로 크신 분이 계십니까?

아닙니다. 아기가 자라나기 위해서는 부모의 헌신과 사랑이 없이 아기는 스스로 클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혼자 능력있어서 컸다는 사람은 은혜를 모르는 소돔의 백성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의 결국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롯처럼 나그네를 공대하고, 어려운 이를 돌아 보며, 은혜를 갚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죄악의 도시에서도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10-1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10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으며

11 문 밖의 무리로 무론 대소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곤비하였더라

롯이 도움을 줬던 그 두 사람이 나중에는 롯을 구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은혜는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소돔백성이 죄악을 행할 때 그 죄악이 그 자신들에게 돌아오듯이 말입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오히려 은혜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나누었던 은혜가 언젠가 여러분의 삶 속에 되돌아와 주님의 풍성한 결실이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 우리가 한 게 없음에도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셨다...!!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딱 크게 두가지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없이는 롯의 구원도 없습니다. 자녀를 위해, 가정을 위해, 교회를 위해 중보기도하십시오. 적극적인 중보... 끝까지 배웅하면서 아브라함은 중보함.

둘째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기억하시고,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은혜를 모르면 소돔백성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그 결국은 멸망입니다. 스스로 크는 사람 하나 없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하루를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오늘도 말씀으로 깨우쳐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가 소돔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살았고, 하루 하루 만나는 이들에게 상처를 주며 살았습니다. 이 아침에도 은혜를 베풀기보다는 은혜받기만을 구하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중보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롯처럼 은혜를 아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있기 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를 위해 사랑과 희생을 쏟았는지를 기억하며, 우리 자녀들과 오늘 만나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사랑과 희생을 나눌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