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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들

빌립보서 3장 1~9절 설교(예수를 아는 지식)

* 성경봉독 : 빌립보서 31-9

 

예수를 아는 지식

제인 구달 이라는 동물학자가 쓴 희망의 밥상이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거창한 환경보호운동을 이야기할 때 지구온난화와 빙하에 관해 이야기하기 쉬운데, 제인 구달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필수적인 밥상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매일 마주하는 밥상 속에서 우리가 늘 먹는 음식에 관해서 생각해보게 만듭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유기농인지, 유전자 변형을 통한 음식인지에 대해서 묻습니다. 달걀 하나를 놓고 보더라도, 양개장 달걀인지... 그냥 자연 속에 풀어놓고 낳은 유기농 달걀인지를 따져 보라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싼 가격에 산 달걀은 부리가 딸리고 아주 비좁은 곳에서 평생 알만 낳다가 죽은 닭이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 달걀을 먹은 인간의 건강은 어떻겠느냐는 것이죠. 이러한 지식을 알고 나서 음식을 먹는다면, 한 번 더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니 좀 불편하십니까? 생각 없이 먹을 때는 맛있고 좋았는데 이 음식이 국내산인지 중국산인지 따지기 시작할 때 머릿속은 복잡해집니다. 무언가를 의식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식하고 살아갈 때 행동과 말에도 제약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뭔가 불편할 때 비로소 변화를 택합니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서야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를 아는 지식이란 제목으로 함께 하나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많아질 때 우리도 날마다 새로워지길 소망합니다.

좀 불편함도 느끼고,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자각도 하고, 좀 더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1)

우리가 읽은 빌립보서 31절에서는 첫 마디가 끝으로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빌립보 교회 형제들에게 하고자 하는 말을 이야기 하는데 그 말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빌립보서가 무슨 서신이라고 했죠? “기쁨의 서신” “옥중서신

바울은 끝까지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권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도 좋고, 안해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해야 하는 명령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라면 상황이 안좋고, 고통 가운데 있을 지라도 무조건 웃어야 합니까? 억지러 기뻐하는 것은 참된 기쁨이 아닙니다. 기뻐하는 척 하는 것이지, 정말 기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은 자기 자신 보다 우리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나를 위해 하는 일인지, 주님을 위해 하는 일인지를 잊지 말라는 말입니다.

교회에서 일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위해 일한다면, 섭섭한 일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내가 이만큼이나 봉사하고 헌신했는데 생각하면.. 서운하고 섭섭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교회에서 일하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잊지 않는다면, 그 어떤 일이든 기쁨으로 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내가 왜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금하고,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고 와서도 순장이라고 또 교육을 받으러 이 저녁에 나옵니까?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그 은혜의 감격이 커서.. 나를 살려주신 그 분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주님 안에 있으면 그 어떤 세상적인 공격과 상처에도 자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나를 향한 어떤 비난의 말, 상처의 말을 들을 때 밤잠을 잘 수 없을 때가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존심이 상한 것이죠. 분노 게이지가 올라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예수님 안에 거할 때 그러한 공격과 비난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바울은 자기 자신의 육체의 자랑을 합니다. <빌립보서 5-6> 말씀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로마시민권을 가진 자요, 가말리엘 문하생입니다. 뭐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런 그가 이제 천막 만드는 사람이 되어서 세상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거렁뱅이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쫓겨다니기도 하고, 돌맞아 죽을 뻔하고, 감옥에 갇히고..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한다면 도저히 이런 일을 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일을 계속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 말씀 속에 답이 있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는 기쁨은 인간이 결코 손댈 수 없는 것이고,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입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이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입니다. 우리가 바울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빼앗길 수 없는 우리 주님에 기쁨의 원천을 둘 때 우리는 주님이 주신 기쁨으로 충만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쉽게 빼앗길 수 있는 것에 기쁨의 원천을 두고 있다면, 그 기쁨은 잠시 잠깐 뿐입니다. , 명예, 물질, 사람, , 이 모든 것은 너무나 쉽게 기쁨을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영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기쁨의 원천되길 소망합니다.

좀 더 우리가 적극적인 방식으로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주 안에서 기뻐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날마다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을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주 안에서 기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킬 때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고통스럽고 외로울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눈에 눈물이 나오고,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얼마나 귀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찬양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이 평안할 때가 있습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 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 바라보시면서 괴로움, 아픔, 상처, 고통을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 바라볼 때 우리 주님이 주신 평강과 기쁨으로 충만한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한다는 것은 성령께 사로잡힌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직접적으로 체험한 그 다메섹 체험은 예수님께 완전히 사로잡힌 바울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께 사로잡힌 삶을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고, 예수님의 손이 우리를 주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꼼짝없이 예수님께 붙들린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습니다. 믿으십니까?

마찬가지로 봉사를 하고 선행을 하고, 구제를 할 때 조차도 성령에 붙들려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그렇지 않는데 어떨 때 보면 정신나간 선행을 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돕고 싶고, 섬기고 싶고, 갑자기 그 사람이 생각나고, 그 사람을 향한 기도가 나올 때가 있는 것이죠.

성령께서 감동주시면 시키지 않는 일도 하는 것입니다. 없는 일도 만들어서 하게 됩니다성령의 능력으로 봉사하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바울의 변화된 이유 예수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 때문 (7-8)

그리스도인이 되면 어떤 점에서 삶이 완전히 변할까요?

첫째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뀝니다.

전에는 그토록 자랑스러웠는데 이제 보니 부끄러웠습니다. 전에는 남들보다 나은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죄인 중의 괴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갈수록 자기 마음의 부패함을 깨닫습니다. 그 때에 자신을 온전케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고,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뀝니다. 전에는 외적인 신앙에 만족했지만 이제는 영적인 본질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해볼 때 이전에는 자기의 의와 공로는 내세워 나아갔지만 이제는 은혜의 보좌 앞에 엎드려 우리 주님의 이름만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 7-8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바울이 자신이 전에 가지고 있었던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 배설물처럼 버린 이유는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아는 그 지식, 그 구원으로 인해 바울은 자신의 자존심, 자부심을 다 내버렸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사귀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우리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가 최고가 아니라 예수님이 최고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죽음이 제일 두려웠다면, 이제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사실은 바보 취급을 자처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 예수를 아는 지식이 우리에게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