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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들

빌립보서 2장 12~18절 설교 (너희 구원을 이루라)

* 성경봉독 : 빌립보서 212-18

너희 구원을 이루라

부활은 죽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죽었기에 부활할 수 있습니다. 부활을 묵상하다가 미션홀 앞으로 갔습니다. 거기에 화분 둘이 놓여있는데 강단화분으로 썼던 나무들이 앙상하게 메말라 있었습니다. 손으로 만지면 툭툭 부러진 것을 볼 때 이미 죽은 나무입니다. 그런데 그 밑에 보니까 봄이 와서 그런지 새파란 풀들이 작은 나무들이 잎을 쭉쭉 뻗으며 돋아나 있었습니다. 죽은 나무 밑에 생명의 풀들이 샘솟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을 때 수많은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열매로 부활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자랑은 예수 믿는 성도들이고, 빌립보교인들이 바로 자신의 자랑이라고 말합니다. 자랑을 열매로 바꾸면, 사도 바울의 열매는 빌립보 교인들이고 예수 믿는 성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활주일 우리가 작정한 태신자들, 우리가 마음에 품은 태신자들.. 그들이 우리의 자랑이요 열매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죽어 썩어질 때 그들이 아름다운 열매되고, 하늘의 상급되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1) 구원을 이루라!(12)

이루라완성하라, 실현하라, 온전한 결과를 이끌어내라, 시작한 일을 마무리하라

기독교를 빗대어 자력종교가 아니라 타력종교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공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을 보면 일정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 하나님의 심판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 하나님의 구원>

우리 성도들의 구원을 보면 단계가 있습니다.

먼저는 우리의 죄를 깨닫습니다. 죄로 인한 심판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심판을 면하기 위하기 위해서 자신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 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대속의 은혜와 구원의 감격을 맛봅니다. 이제 중생의 은혜를 맛보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되고, 주님 안에서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고 성화의 삶,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완전한 구원을 이루는 것은 영혼구원만이 아니라 삶의 구원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으면 천국가는 영혼구원만을 이야기하는데 아닙니다. 삶의 구원도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땅 가운데 삶, 생명 구원도 온전히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몸의 구원인 것이죠. 영혼구원과 삶의 구원을 합쳐서 전인격적인 구원이라고 해서 전인 구원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에는 치료와 치유사역을 함께 하신 것입니다.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낫게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낫게 하는 사역을 했습니다. 베드로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질병이 떠나가고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삶을 회복했습니다. 아직 우리에게 무언가 부족하다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오늘 말씀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12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한 절 밖에 안되는 말씀이지만 너무도 귀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는 바울이 결론적으로 말할 때 쓰는 말이기도 하지만, 어떠한 실제적인 행동을 권할 때 쓰는 말입니다. 바울 서신의 특징 중에 하나가 먼저는 이론에 관해서 이야기 한 후 나중에 실천에 관한 부분을 이야기합니다. 이 실천의 첫 마디가 바로 그러므로입니다.

지금까지 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 했다면, 그러므로 구원의 실제적인 행동은 이렇게 해야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이 말씀에는 신앙의 목적, 신앙의 자세, 신앙의 때(시간)에 관한 것이 들어 있습니다.

먼저는 신앙의 목적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왜 예수 믿습니까? 구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왜 하나님을 예배합니까? 구원 얻은 은혜에 감사해서 예배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립니다. 예수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구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두 번째, 신앙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신앙의 자세는 12절 말씀에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믿음생활할 때는 장난이 아니라 엄숙함과 경외함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와 신앙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시대입니다. 교회가 도처에 많이 있고, 교회 바꾸는 것을 우숩게 생각합니다. 맘에 안들면 다른 교회가면 되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성도들도 없지않아 있습니다.

유럽에 고도, 오래된 도시에 가보면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가장 높은 건물은 바로 교회요, 십자가 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가장 가까운 곳이 바로 교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도시의 중심은 교회였습니다. 중세에 가장 무서워한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 바로 출교였습니다. 교회에서 나가는 벌을 받을 때, 그것은 곧 도시에서 추방당하는 것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 추방당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무거운 벌 중에 하나가 출교입니다. 지금 교회에서 출교라는 징벌을 내리면 그냥 코웃음 칠 것 같습니다. 교회가 여기 하나뿐인가 하면서 아마 옆 교회로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얼마나 진지한 마음으로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신앙생활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구원을 놓고 생과 사를 놓고, 천국과 지옥을 놓고, 믿음의 영적싸움을 다하고 있습니까?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믿음의 선진들은 믿음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습니다. 청교도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나라와 고향을 떠나 목숨을 걸고 신대륙으로 향했습니다.

너무나 가벼워져 버린 이 시대의 믿음은 사실 믿음이 아닙니다. 기호식품처럼 취급되는 취미생활보다 못한 것이 믿음생활이 되어 버렸습니다. 신발 바꾸듯이, 옷갈아 입듯이 교회를 바꿉니다. 참 무서운 시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세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경외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티비를 보다 보면 종종 절에서 일천배 하는 장면을 볼 때도 있고, 이슬람교도들이 메카를 향해 절을 하는 모습을 볼 때도 있습니다. 그 모습 속에서 누구나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자신의 종교를 지키는데 사뭇 진지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모습이 있습니까? 경박하고 들뜬 모습의 신앙만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기독교에 있는 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피흘림이 있습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랐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지라도 이 십자가를 붙들고 우리 주님의 뒤를 따라 걸었습니다. 세상을 등지고 나아가고, 하늘을 향해 걸음을 옮겼습니다.

세 번째로, 신앙의 때와 시간에 관해서 나옵니다.

언제 신앙생활을 해야 하냐? 바울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항상 해야한다고 말합니다.

일주일 중에 주일 하루만 신앙생활하는 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곁에 있을 때만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없을 때도 항상 예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항상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믿음생활 신실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항상 주와 함께 있으라... /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고 있습니까? 일주일동안 말씀과 경건서적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대비해서 우리가 신문과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핸드폰을 하는 시간을 기록해보십시오.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시간을 온전히 구원을 이루는 일에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빛된 그리스도인(14~16)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참 어려운 일입니다.

이 세상 살면서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생각해보면 얼마나 원망거리가 많습니까?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말이 있듯이 원망거리 생각해보면 수없이 많습니다. 어떻게 모든 일에 원망이 없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모든 일에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고 살 수가 있습니까?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 내 권리도 찾고, 내 유익도 얻고, 내 자리도 찾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모든 일을 시비 없이 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우리 교회 앞에 누군가 쓰레기 더미를 쌓아놓는다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안된다고, 쓰레기 내놓지 말라고 이야기 하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16절에 생명의 말씀을 밝혀... 이 말은 생명의 말씀을 붙들어 라는 말도 됩니다. 생명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빛의 자녀,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살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바울 시대처럼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 삽니다. 어두운 세상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티비만 보면, 여당 야당 싸우고, 마약 사건이 터지고, 테러가 일어나고, 뭐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어떻게 원망과 시비가 없이 살 수 있을까요?

이 때 하나님의 섭리에 관해서 생각해봅시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 되심을 믿습니까?

이 말은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모든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이 일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빛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소망의 등불을 밝힐 수 있습니다. 새벽여명을 앞두고 정말 가장 어두운 그 때에 새벽의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리는 섭리를 알고 믿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전에 참 감명깊게 본 영상이 있다면, 2004년에 여해 강원용 목사님과 사랑의 교회 은보 옥한흠 목사님의 대담에 관한 영상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90세가 넘은 강원용 목사님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강목사님, 한국교회가 수는 많은데 자꾸 세속화되어가고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런 위기의식을 갖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때 강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는 위기의식을 갖아야 합니다. 저는 옥목사님보다 더 큰 위기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 실망하지 않느냐 하면 구정물 가득하고, 더러운 물이 가득찬 것 같이 우리 눈에 보이지만 그 밑바닥에서 샘물이 솟아오르고 있고, 우리 예수님께서 형편없는 교회와 성도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해 가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거기에 실망할 필요가 없다.

기독교 고전 중에 존 플라벨이 쓴 <섭리의 신비> 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첫 번째 주장은

이 세상에서 성도들과 관련된 일들은 특별한 섭리의 지혜와 돌보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닥친 환난과 고난 속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하나님의 손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 일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악을 선으로 바꾸시고, 시편 기자처럼 3011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상복)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주님의 섭리를 믿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섭리의 신비가,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등 뒤에서 붙드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우리는 빛의 자녀로 살 수 있습니다. 어두움을 빛으로 밝힐 수 있습니다. 악을 선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을 때에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을 수 있습니다. 왜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우리가 이 예배의 자리에 온 것도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몸이 아픈 것도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고통이 있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아픔을 통해 주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게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온 만물의 주인됨을 알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자랑거리가 바로 빌립보 교인들이 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을 관제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릴지라도 기쁘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그렇게만 흠없는 자녀가 된다면 자신이 죽어도 좋고, 죽어도 기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흠없는 자녀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러한 흠없는 자녀를 잉태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변화되어 가는 것을 보는 것처럼 행복한 일은 없습니다. 자식이 자라나 효도하고, 성장하는 모습은 큰 기쁨입니다.

자기 자녀가 계속 유치원만 다니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가슴이 무너질 것입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 자라라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곁에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성장하라고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한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학교 교사들만 맛보는 것이 아니라 태신자를 잉태해서 새가족이 되고 성도가 되고 집사, 권사, 장로가 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직분자, 하나님의 예배자, 성도가 되어가는 그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