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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들

빌립보서 2장 1~11절 설교(그리스도의 겸손)

* 성경봉독 : 빌립보서 21-11

그리스도의 겸손

화사하게 피어 있는 벚꽃잎 속에 서기만 해도 눈에 생기가 돌고, 눈길이 부드러워집니다. 세상의 시름을 잊고 하나님 주신 자연 속에서 천국을 맛보기 때문입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닌데 다들 벚꽃을 보러 나옵니다. 예수를 믿든 안믿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자연만물의 아름다움에 반응하도록 세팅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다른 데 보다 우리 교회 앞에 있는 벚꽃 나무가 더 풍성하게 꽃을 피웠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처음 심을 때 우리 교회 것을 좀 더 큰 것으로 갖다가 심지는 않았을 텐데 이렇게 커진 것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벚꽃을 주십니다. 그것을 은혜로 볼 때 감사와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해를 비춰주시고, 비를 내려주십니다. 우리가 은혜의 눈으로 볼 때 입으로 찬송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살아가고 예배할 수 있음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1) 불화와 불일치 속에 한마음 한뜻을 추구하라! (1~4)

빌립보교회에서 가장 큰 문제는 불일치와 다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계속해서 한 마음으로 한 뜻으로 협력하라고 권면합니다.

127절 너희가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2절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220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42절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 교회 안에는 다툼과 허영이 있었고 불화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도 불화가 있지만, 가정 안에도 불화가 있습니다.

부부간에 불화가 있고, 황혼 이혼이 급증하고 있다고 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불화와 다툼이 있어서 연을 끊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가정 만이 아닙니다. 요즘은 세대간의 불화와 이수역 폭행사건과 같은 남성과 여성의 성 불화도 발생합니다. 나라와 나라가 전쟁에 휩싸이고, 경제전쟁은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불화가 끊이지 않는 곳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사도 바울의 시대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진 것 같습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 온전한 하나 됨이 있습니까? 경제적 여건에 따라 학력에 따라 사는 지역에 따라, 출신에 따라 암묵적인 파벌이 형성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 믿는 거룩한 성도들이 모이는 곳에도 불화가 있고, 다툼이 있습니다.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싸우고 다투다보니까 말도 안하고, 얼굴도 쳐다 보지 않습니다. 서로 손 잡는 것은 기적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꼴보기 싫어서 2부 예배가 아니라 1부예배를 드리고 얼른 집에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서로에게 막힌 담이 있는 것이고 안 보이는 벽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불화와 다툼을 없애고, 한마음 한 뜻이 되게 하기 위한 처방전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겸손입니다.

동방정교회에 아토스의 성자 실루안이란 수도사가 있습니다.

그가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영성의 주제는 겸손이었습니다. 실루안은 겸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겸손이란 자신을 낮추고 통회하면서 우리의 무가치와 연약함을 자각하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의 영혼을 바다와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바다에 돌을 던지면 잠시 동안 표면 위에 작은 파도가 퍼져 나가지만 곧 밑바닥 속에 가라앉아 버리듯이, 환란들은 겸손한 자의 마음 속에 가라앉아서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아를 가지고 있는 한 누구나 교만합니다. 아집과 자만심이 있습니다. 도저히 버리지 못하고 포기하지 못하는 자존심과 체면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물리치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겸손입니다.

인간이 어떨 때 겸손합니까? 자신의 죄를 깨달을 때 겸손합니다. 그래서 엄청난 업적을 남기고 수많은 교회를 세운 바울은 자신을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또 인간이 어떨 때 겸손합니까? 고난 가운데 자신의 약함을 발견하게 될 때 겸손합니다. 회사에 부도가 났을 때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엄청난 질병에 걸려 쇠약해질 때에야 겸손합니다.

잠언 334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오늘 이 밤에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겸손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겸손할 수 있는 방법이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의사 앞에 가면 겸손합니다.

변호사 앞에 가면 겸손합니다. 어떤 일에 있어 프로나 전문가 앞에 가면 작아지고 겸손해집니다.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유의 주요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서보십시오. 우리는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남의 티를 보기 전에 나의 들보를 볼 때 우리는 겸손해진다는 진리를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우리 자신의 들보를 발견하고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겸손합니다. 기도에도 3단계가 있습니다. 입으로 부르짖으며 하는 기도가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마음으로 하는 내면의 기도가 있고, 하나님과 영적으로 하나되는 영적인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나타나는 특징은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날마다 머리숙여 겸손히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2)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5~8)

5~8절까지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성육신 인카네이션을 뜻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하늘궁전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는데 낮고 천한 마굿간에 육신을 입고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따뜻한 방이나 침대가 아닌 동물들이 사는 마굿간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사람이 되셨습니다. 주인이 종의 자리로 내려 왔습니다.

자기 낮춤. 예수님의 마음은 지고한 겸손의 마음입니다. 힘이 없어서 종이 된 것이 아닙니다. 힘이 있고, 능력이 있고, 충분한 자격이 됨에도 불구하고 낮은 자리에 임한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힘없는 굴종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복종하신 것이고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 겸손의 상징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자기의 가장 귀한 생명을 내려 놓고, 겸손히 복종한 예수님의 마음이 담긴 사건이 십자가입니다. 예수께서 이 십자가를 질 때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십자가를 질 때 막힌 담이 헐고,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한 마음 한 뜻이 되었습니다. 주 안에 서라고 계속 말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라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 아직도 반목과 불신과 다툼이 있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는 자가 먼저 해야 합니다. 믿는 자가 먼저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믿는 자가 먼저 행동해야 합니다. 믿는 자가 이 갈라진 조국을 위해 행동해야 합니다. 믿는 자가 갈라진 교회의 일치를 위해 행동해야 합니다. 믿는 자가 가정과 자녀를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가정이 평안하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누군가 십자가를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가정이 평안한 것입니다.

교회가 잘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알게 모르게 뒤에서 자신을 내려놓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이 더 많은 대청교회 되길 축복합니다.

3) 우리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자신을 낮추신 우리 주님을 높여주십니다(9-11)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먼저는 우리도 그러한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을 낮춘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초대교회 처음 순교자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던 스데반 집사를 생각해보십시오. 믿음을 지키고 신사참배를 반대한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을 생각해보십시오두 아들 죽인 원수를 양아들 삼은 산돌 손양원 목사님을 생각해보십시오. 가톨릭 파문을 두려워하지 않고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를 생각해보십시오.

자기 자신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믿음을 지킨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을 생각해볼 때 그들 중심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그들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고 죽었습니다. 그들이 지금도 우리에게 감동과 영향력을 끼친 것은 십자가의 삶을 그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철저히 하나님 앞에 낮췄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시스는 자신의 가진 부와 재산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라 걸인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철저히 낮췄습니다. 마틴 루터가 남긴 유언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구걸하는 거지들이다. 이것이 참이다라고 했습니다.

고백록을 쓴 성 어거스틴은 처음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410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우리가 왜 다투고 깨지느냐? 높아지기만을 바라고, 인정받기만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낮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궂은 일은 피합니다. 자존심 상할 일은 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이 제자의 발을 씻기 위해 무릎을 꿇으셨는데 우리는 주님처럼 무릎꿇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사순절 기간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이기적인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로소 낮아질 때 기쁘게 부를 수 있는 찬송이 있습니다.

찬송가 213

1절 나의 생명 드리니 주여 받아 주셔서 세상 살아갈 동안 찬송하게 하소서

2절 손과 발을 드리니 주여 받아주셔서 주의 일을 위하여 민첩하게 하소서

5절 나의 시간 드리니 주여 받아주셔서 평생토록 주 위해 봉사하게 하소서

1) 불화와 다툼 속에서 한 마음을 품으십시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2) 예수의 마음, 십자가의 마음은 겸손입니다. 3)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낮출 때 오히려 높여주신다. 나를 별세시켜주옵소서 기도할 때 우리 주님이 살려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