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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들

마태복음 17장 1~8절 설교(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마태복음 171-8

한번 생각해보면, 변화한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익숙해지고 편한 자리를 두고 낯설고 불편한 자리에 앉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변화는 확실한 것에서 불확실한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주일예배만 드리던 사람에게 수요예배 한번 나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늘 차만 타고 다니던 사람이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전에 대학원 다닐 때 지하철을 탔는데 두 분의 아주머니가 혜화역 가려면 어떻게 가야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마침 저도 4호선을 타고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로 가시느냐고 물어보니까 혜화동 성당을 간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분이 하는 말이 자기는 서울에 오래 살았는데 늘 자동차를 타고 다니다 보니까 지하철을 어떻게 타는지 몰라서 물어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두 아주머니를 성당까지 고이 안내해드렸던 일이 있었습니다. 늘 자동차만 타던 사람은 지하철 타는 일이 두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변화가 어렵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다 변화의 역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만나서 변화되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나아갑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면서 이스라엘이 되는 놀라운 변화를 겪게 됩니다. 도망자 모세가 미디안 광야 떨기나무 불꽃에서 하나님 만나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변화됩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 만나서 모세의 시종에서 여호와의 종으로 변화됩니다. 아이와 같은 예레미야가 하나님 만나서 눈물의 예언자가 됩니다. 세리장 삭개오가 민족의 배신자였다가 예수님만나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변화됩니다.

사울이란 청년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 만나서 이전에는 핍박자요 포행자요 훼방자였으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됩니다. 뭐 오늘 성경에 나온 변화된 인물들과 기독교 역사 속에서 하나님만나서 변화된 이야기를 하려면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복음서 말씀 속에서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과 늘 변화되고자 했지만, 변하지 못했던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산에 오르실 때의 일들(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예수님은 6일 후에 제자 중에서도 특별히 아끼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6일 전에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베드로의 유명한 고백이 있었고, 뒤이어 예수님의 수난예고 이후 예수님 사역을 방해하는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무섭게 질책하시는 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6일 후에 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예수님께서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실 때 마다 특별한 일들이 일어난 것을 보게 됩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그 유명한 산상수훈(5:1)의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 지라

주옥 같은 교훈과 권위있는 말씀, 도덕률에 있어서 최고의 말씀을 설교하셨습니다.

또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오병이어 기적이 나옵니다. 그 기적 이후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산에 올라간 그 시간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이요, 하나님 만나는 시간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14:22-23). 뒤이어서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17장에 변화산 사건(17:1-8)이 나오고, 예루살렘 성전과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26:36).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는 것은 하나님 말씀 선포하는 시간이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귀한 시간이었음을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주의 성전에 나온 모든 분들에게 이러한 하나님 만나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변화되신 예수님(2)

산에 오를 때마다 예수님께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이 산에 올랐을 때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 놀라운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이 변화산 사건에서 예수님의 얼굴과 옷, 그 모습은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외형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처럼 화장을 해서 새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형을 해서 그런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전체적인 복음서의 틀 안에서 보면, 이 변화산 사건은 예수님 사역의 터닝포인트와도 같습니다. 사역의 방향 전환을 가져온 사건입니다. 지리적으로 보면, 갈릴리 호수 주변과 두로와 시돈,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사역하셨는데 이제는 유대지역과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역 내용으로 보면, 이제는 단순한 치유와 기적, 말씀 선포 사역이 아닌, 십자가 사역을 향해 나아갑니다.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한 십자가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구원하시기 위한 십자가 사역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오려면, 먼저는 자기부인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먼저는 자기 부인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의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가 전문가인데, 내가 몇 년 동안 이 일을 해왔는데, 내가 피땀흘려 수고한 일인데, 내 가족인데, 내 돈인데, 내 물질인데, 내 것이라는 이 모든 것을 철저히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부인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쉽지가 않습니다. 나는 내려놨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모든 영광의 자리에 자기 자신이 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에게 분명한 자기 부인이 있는지 없는지는 우리의 기도하는 내용을 들여다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도 우리는 자기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을 놓고 기도하지,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을 놓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나의 가족, 나의 사업, 나의 교회, 나의 민족, 나의 행복.. 이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아프리카를 놓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 옆에 교회를 놓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 아파트 이웃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 아들보다 공부 잘하는 친구를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중심적으로 사는 이기적인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내 자아가 살아서, 나의 얄팍한 지식으로, 내 경험으로, 내 힘을 의지해서 사는 분이 있다면, 오늘 십자가 앞에 새롭게 변화되길 바랍니다.

이러한 자기 부인을 사도 바울의 고백으로 말한다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하는 신앙 고백입니다. 자기 부인을 하게 되면,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십자가 지는 것은 멋있어 보이고, 대단해 보입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십자가는 고난이요, 무거운 짐이요, 엄청난 부담과도 같습니다. 무거운 짐을 들고 한 발 한 발 힘겹게 내 디디듯이 걷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고유한 십자가가 있습니다. 누가 대신 져 줄 수 조차 없습니다. 아무리 자녀들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고 싶어도 자녀들 스스로 해야할 것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이고, 누가 하기 싫은 곤란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것이 꼭 십자가 지는 것과도 같습니다. 자녀들 사랑하기에 부모들이 죽을고생하면서 돈 벌어다가 자녀들 키우잖아요. 빨래, 청소, 설거지 누가 하고싶어서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랑하기에 그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누가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이 십자가요.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놓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 사랑과 구원을 마음 속으로 체험하고, 믿었을 때에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세상이 열립니까?!

사실 신앙생활을 한 지 얼마되지 않을 때는 모든게 기쁨이요, 은혜요, 축복이요, 감사밖에 없습니다. 헌데 신앙생활을 하다보니 점점 이게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적당히 타협하게 되고, 세상에 한발 담가놓고, 교회에 한발 담가놓고 적당히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십자가가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마가복음834절에 나오고, 누가복음 923절에도 나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가복음에만 날마다 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습니다. 사실 십자가 지는 것이 눈 한번 감고 진다면, 그것은 어쩌면 쉬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냥 한 번 십자가 지고 말지 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날마다 십자가 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별새벽기도회 한번 나오기는 쉽습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한 번 일회적으로 십자가 지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날마다 날마다 삶 속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성결한 삶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는 반드시 이 자기부인과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 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따르겠습니까?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3-4)

세 번째로 베드로의 반응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베드로가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더불어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이 말씀 본문을 계속해서 읽는데 이 한마디 문구가 계속해서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이 말 한마디만 놓고 보면, 변화에 대해서 얼마나 사람들이 싫어하는 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불같은 열정의 사람이지만, 늘 실수투성이의 사람입니다.

물위를 걷다가 물에 빠진 베드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지만, 사탄아 물러가라는 말을 들은 베드로, 주를 위해 죽겠다고 했지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자, 무덤을 향해 가장 먼저 달려간 제자였지만, 갈릴리 호수의 어부로 다시 돌아간 베드로. 그 모습 속에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습니까?! 주님을 따라 새롭게 변화되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