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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들

데살로니가전서 1장 1~10절 설교(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 소망 사랑)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사랑,소망

데살로니가전서 11~10

사도 바울이 2, 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꼭 들렸던 곳이 마케도니아 지방의 데살로니가입니다. 바울의 서신서 중에서 가장 먼저 쓰여진 책이 데살로니가 전서입니다.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냐 지방의 수도이고, 해안가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얼마나 많은 우상과 종교가 있었을까요? (사도행전 171~2절 찾기)

사도행전 171~2절 에 보면, 거기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많은 유대인 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거기에서 3주 동안 성경을 강론하며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시기로 인해 밤에 도망치듯 베뢰아로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이 머문 시간은 얼마 안됐지만, 복음의 씨앗이 자라나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생겨났습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요?

사도 바울은 그 기쁨을 담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교회가 생겨나고 믿음의 역사가 일어난 것을 보고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고, 그 교인들 한 사람 한사람을 택하셨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하면서 기도하는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 12~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쉬지 않고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의 역사를 기억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역사란 단어의 어원을 보면 에르곤이란 말입니다. 그 뜻은 , 또는 행위라는 의미입니다.

주의 형제 야고보는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26)고 선언했는데, 여기에서 행함으로 번역된 단어가 오늘 본문과 같은 에르곤을 말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얼마나 믿음 안에서 행동했는 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우상이 판치는 곳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지키기란 쉽지 않았을텐데, 갖은 핍박과 위협 속에서도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 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

바울 시대에는 핍박과 시기 속에서도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 갔다면, 우리의 시대에는 세상의 유혹과 물질 속에서도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 가야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고, 고백하는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행함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믿음과 행함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믿음을 많이 강조하기 마련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믿음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우리가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행함은 따라오지 못합니다. 그런데 믿음의 확실한 증거는 행함입니다.

오늘 본문 5절에는 이렇게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

사도 바울은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 지를 보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은 바로 2장에 나오는데요. 26, 9절을 보면,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복음 전도할 때에 능히 존중받을 수 있지만, 너희든 다른 사람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했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9절을 보면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은 말로서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밤낮 수고함으로 복음을 증거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25년 넘도록 목회를 하고 나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큰 교회를 목회하고 세웠지만, 설교를 통해서 사람의 인격이 변화 된 것을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설교는 잠시 잠깐 감동과 은혜를 줄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인격까지는 변화시키기 어렵다는 것이죠. 사람의 인격이 변하기 위해서는 삶 속에서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 행함을 통한 믿음의 역사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교회다닌다고 나 예수 믿는 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단순히 신앙생활이 아니라 장공 김재준 목사님이 강조했던 생활신앙으로서 살아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행위요, 데살로니가 교회에 일어났던 믿음의 역사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 속에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니까, 사도 바울이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7~8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의 역사로 인해서 사도 바울이 다른 지역에 가서 아무 말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전도 안해도 믿음의 소문만 듣고도, 교회 나오고, 예수님 믿는 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사랑의 수고를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필리아도 아니고 에로스도 아니고, 아가페의 사랑을 뜻합니다. 필리아가 우정과도 같은 사랑, 에로스가 이성간의 사랑을 뜻한다면, 아가페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사랑의 수고를 할 때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사랑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어떠한 사랑의 수고를 했는 지는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의 수고와 애씀을 누구를 통해 배웠는지는 나와 았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사도 바울의 사랑의 수고와 애씀을 보고 배웠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도 바울의 사랑의 수고를 보고 그대로 배웠습니다. 그 사랑의 수고를 통해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럼 사도 바울은 누구에게 그러한 사랑의 수고를 배웠을까요?

스데반을 통해서 배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스데반은 열두사도들을 통해서 배웠을 것이고,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데살로니가 교회가 든든히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 대청교회 안에서의 사랑의 수고를 통해 오늘도 세워져 갑니다.

아무 조건 없는 사랑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우리 주님의 조건 없는 사랑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습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얼굴이 아무리 개성있게 생겼어도, 성격이 삐뚤어졌어도, 가난하고 남루할지라도 우리 주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다 받아주십니다. 이 십자가 사랑의 수고를 통해 오늘도 교회는 든든히 세워져 갑니다.

세 번째로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칭찬합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의 종교입니다. 초대교회의 생명력있는 복음 증거가 가능했던 것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부활신앙과 종말론적인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본문 19~1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린느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이단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면 모든 일이 다 끝나니 재산이고, 가족이고 뭐고 다 필요없이 바치고, 기도만해라! 신천지처럼 144천명만 구원해주니까 그 안에 들려면 기존교회 성도들을 끌어다가 채워라!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주님 오실 때만 바라보면서 그냥 현실을 무시하고, 살기 보다는 늘 깨어서 정신 차리며 살라고 말씀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6~8 말씀 찾아서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현실가운데서도 깨어 정신을 차리며 살라고 이야기 합니다. 세상사람들과 똑같이 살지 말고 구별된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현실 속에서도 철저히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예수님께서 구원해주심을 믿고 소망의 투구를 쓰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권리를 누리려면, 늘 책임이 따르듯이, 주님을 향한 소망에는 인내가 늘 따라다닙니다. 인내가 없는 소망은 그냥 한순간의 꿈일 뿐입니다. 이 소망의 인내가 없이는 믿음을 져버리기가 쉽습니다.

디모데후서 410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어서 속히 오라고 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데마라는 사람은 소망의 인내가 없었기에 참지 못하고,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나옵니다. 이것은 200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주님을 버리고 세상을 사랑하여 믿음을 져버리고, 교회를 떠납니까?! 주님 오실 때까지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인내하지 못하고 실수하는 이들이 나옵니다. 에서가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야곱에게 하나님이 주신 장자권을 팔아버립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 전에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손으로 번제와 화목제물을 드립니다. 그로 인해 사울왕의 나라가 길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래 참으십시요! 인내는 믿음 안에서도 필요하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도 정말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은 오래참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우리 예수님이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 지를 기억하십시오. 제자들의 무지와 믿음 없음 속에서도 참아주셨고,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신했을 때도, 베드로가 자신을 세 번 부인했을 때에도, 심지어는 십자가에 못박고 조롱하는 무리들을 향해서도 예수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빵을 먹여주고, 병을 고쳐줄 때는 주님이라고 따르던 이들이, 십자가를 매고 죄인처럼 끌려가자 도망치고 나 몰라라 하였을 때도 주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참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낱낱이 다 보고계시면서도 오래 참아주십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 증거를 하면서 얼마나 참았습니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잠 못자고 주리고 목마르고 춥고 헐벗기를 또 얼마나 했습니까?”

이 모든 고난과 위험을 참고 인내했기에 복음 증거를 온전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도 동족 유대인에 위험 속에서 복음을 증거했기에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혹시 복음으로 인해 고난받고, 상처입고, 생활이 어려우십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소망의 인내를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사람은 잊어버릴지 모릅니다. 부모도 그렇고 자식들도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다 기억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관해서 나눴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기억하십시오. 데살로니가 교회에 일어났던 그 믿음의 역사가 우리 교회에도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의 수고가 우리 교인들의 삶 속에서 충만하길 소망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가 우리의 중심에 있어서 늘 깨어 근신하며 세상과는 구별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