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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들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설교(성령을 따라 행하라)

* 성경봉독 : 갈라디아서 516-26

성령을 따라 행하라

감사의 눈으로 보면, 늘 평범해보이던 일상도 얼마나 귀한 하나님의 은혜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평소에 점잖고 신실해보이던 우리 성도님들이 기관 찬양대회를 할 때 보니까 얼마나 새롭게 변하시던지 깜짝 놀랬습니다. 중고등부 청년부야 그렇다 쳐도 2여신도회원들이 보여준 터프함은 아직도 여운이 가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검은 장갑에 징박힌 옷을 입고 오셔서 뜨겁게 뜨겁게 뜨겁게~ 애타게 애타게 애타게~ 이야~

다들 얼마나 뜨겁게 하나님을 찬양하시던지 처음 검은색 옷을 봤을 때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나중에는 찬양의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늘 이 예배 가운데도 그러한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향한 감사가 있고, 주님을 향한 기쁨이 있는 귀한 예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16)

성령을 받은 자는 그 책임이 반드시 따릅니다. 그 책임은 성령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라는 구절을 헬라어로 프뉴마티 페리페테이테라고 합니다. 번역하면 성령에 의해 계속 걸어간다 / 교제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걷는다는 것은 이 문맥에서는 생활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일상생활 속에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매 순간의 접촉을 강조합니다. ‘성령을 따라사는 일은 성도의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아닌 생활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 계속 걸어간다는 것을 묵상하는데 저는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가 생각이 났습니다. 주님을 뒤로 한 채 걸어가던 그 두 제자에게는 이제 희망이 없습니다. 주님을 떠나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그 두 사람에게 찾아가 말동무가 되어주시고, 함께 길을 걸어가실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마음의 변화가 찾아오고 성경말씀을 밝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시간 저와 여러분과 함께 인생길을 걸어가신다면, 우리 앞에 놓인 허무와 죽음과 문제들은 다 해결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질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밝히 보일 것입니다.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인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다시 예루살렘을 향한 길로 돌아갈 것입니다. 가야할 곳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의 방황이 끝나고 이제 인생의 목적이 분명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삶이 바로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는 삶, 예수 그리스도와 걸으며 교제하는 삶, 매 순간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우리 앞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든든할까요?

얼마나 기쁘고 자랑스러울까요? 눈을 감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보십시오. 주님과 먹고 이야기 나누고, 잠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행복합니까? 추운 날씨와 비가 문제가 될까요? 아닙니다.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밥먹을 때도 햄버거를 하나 먹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먹으면 한정식보다 더 맛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한정식이 맛있나요???

우리 주님과 그렇게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성령을 따라 산다는 것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주신 힘과 능력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뜻이나 본성의 욕망이 상충될 때 하나님을 따를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2:13)

우리의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거룩하게 될 수도 없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할 때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해도 죄악된 본성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성령의 통제 아래 죄악된 본성을 두게 함으로써, 그분이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성령을 좇아 살지만 육체의 소욕이 찾아올 때는 어떻게 합니까? 육체의 소욕을 억지로 누르거나 지우려하지 말고 성령을 따라 살면 자연히 없어집니다.

어두운 방에 어둠을 내보내기 위해서는 불만 켜면 됩니다. 육체의 소욕을 내가 어떻게 제어할지 고민하고 결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단지 내가 성령을 좇아 살고 성령을 받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5:16). 끊어버리려고 노력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성령을 향하다 보면 육체의 욕심이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두운 것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더 성령충만을 구하십시오. 그렇다면 어느새 나의 악함과 어두운 것들은 자연히 끊어질 줄 믿습니다.

누구든지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화난 사람, 마음상한 사람의 얼굴을 보십시오.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모두 거울을 꺼내서, 아니 핸드폰을 꺼내서 자신의 모습을 카메라에 비춰보십시오. 다른 사람 보지마시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십시오. 무엇이 보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얼굴에 드러나 보입니까?

우리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입니다. 가장 좋은 신앙인은 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성령을 가졌기 때문에 인격으로 드러나는 신앙입니다. 신앙의 인격화를 이룬 것입니다. 일상적인 습관과 매너와 인격을 통해 예수님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한 책에 보니까 나이 든 목사님과 사모님이 농아, 장애아들을 섬기는 사역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수화도 하면서 그들을 말씀을 양육하고 섬기고 돌보는 일을 합니다. 그 목사님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 여동생도 같이 그 사역을 돕다가 결혼도 하지 않고 일생을 그 일에 헌신하기로 하나님 앞에 서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천사와 같은 그런 일을 하다가 어느 날 몸이 안좋아서 병원에 왔는데 죽을 병에 걸린 것입니다. 아무리 수혈을 해도, 기적이 없이는 낳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때 그 여동생분이 의사와 가족들에게 손짓해서 글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네 글자를 적었습니다. “시신기증유가족들과 의사와 간호사들은 평소 그녀의 삶을 알았기에 모두들 눈물 바다가 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자신의 죽음 앞에서 끝까지 다른 이들을 위한 헌신을 한 것입니다. 그녀의 각막은 바로 기증되게 되었고, 시신은 대학병원에 보내져 연구에 쓰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앙의 인격화는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얼마나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성령님을 모실 때 얼마나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주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 다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도 그러한 좋은 열매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22~24)

영화 바울에 나온 대사 중에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사랑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우리 다함께 읽고 외워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성령의 열매 중에 첫째는 사랑입니다. 아가페 사랑. 우리가 익히 아는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에서도 바울은 사랑이 가장 큰 은사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랑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사랑의 사도 하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사도 요한입니다.

바울과 같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이야기할 때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8)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이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데 이제는 권력의 종교, 거짓의 종교, 부의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교회 안에 사랑의 모습보다도 싸우고, 욕하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모습이 더 많다면, 우리가 이 아가페 사랑을 되새겨보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사랑의 마음이 없는 것이죠. 우리 안에 사랑이 있다면, 서로의 허물을 덮어줄 것이고, 우리 안에 사랑이 있다면, 서로를 위해 눈물 흘리게 될 것이고, 우리 안에 사랑이 있다면, 기도해주고, 찾아가게 되고, 우리 안에 사랑이 있다면, 서로의 필요를 채워줄 것이며, 우리 안에 사랑이 있다면, 행복과 기쁨이 충만해지고, 우리 안에 사랑이 있다면, 자기의 것을 희생하고 헌신하게 되며, 우리 안에 사랑이 있다면,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아 평강이 있을 것이며, 우리 안에 사랑이 있다면, 교회는 더 믿음으로 든든히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과 상황과 세상을 보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떠올릴 때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용서하셨는지를 떠올릴 때 우리는 그만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가득할 때 우리는 오늘 하루도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을 생각할 때 오순절 다락방 초대교회에 임한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순절 다락방에 임한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불같이 뜨거운 열정을 가진 성도들이 밖으로 뛰쳐 나갔습니다. 그 두려워서 다락방에 숨어지내던 자들이 성령을 따라 담대하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렇게 말 못하고 도망치던 베드로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자기 자랑하기에 바쁜 이 시대 속에서 성령의 사람은 주님 자랑하기에 바쁩니다. 우리 주님이 주신 은혜를 깨달아 알기에 기쁜 마음으로 복음 전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할 때 나타나는 현상은 자기 자신의 것을 나누고 섬기고 채워준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노후를 생각하고, 자기 자신의 앞 일만 생각하던 사람이 교회를 생각하고, 다른 어려운 성도들을 생각하며 챙겨주기 시작합니다. 성령님이 없이는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갈라디아서를 쓴 사도 바울을 생각해보십시오. 바울이 바보입니까? 못배운 사람입니까? 그런데 그의 전도 여행을 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담대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여행을 가더라도 비행기값 얼마들고, 밥값 얼마들고, 숙식비 얼마들고 다 따져보고 준비해서 갑니다. 하지만 바울이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성령님이 가라고 하시면 그냥 마게도냐 지경이든 로마든 어디든지 가는 것입니다. 상황이나 환경, 자신의 능력을 보지 않고 오직 성령을 따라 행한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 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지금 이 시대가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경건의 능력은 잃어버린 불쌍한 시대가 되었습니까?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재산 다 갖다 바치고,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 다 때려치우고 교회 봉사하고 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령님이 마음에 감동주시는 그 일을 한 번 해보라는 것입니다. 단 한 번 만이라도 가슴 두근거리는 그 성령님이 품게 하시는 그 일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돕는 일이든지,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는 일이든지,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일이든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하나님께 행할 때 삶 속에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중표 목사님이 쓴 <나는 매일 죽는다> 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목사님이 교회를 상가교회로 옮기는 문제를 놓고 기도하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늘 기도하는 자리에 통장과 도장이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목사님, 제가 3년 동안 받은 은혜와 감격의 눈물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목사님과 이 교회에서 너무 큰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저는 이제 주인집을 따라 이사를 갑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한신 교회에 출석할 수 없습니다. 적은 물질이지만 은혜 입은 제단 앞에 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적금을 들어 3년 가까이 부은 통장입니다. 아직 몇 달 남았지만 성전 건축하는 일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 성도는 경남 아파트의 한 부잣집에서 일하고 있는 가정부였습니다. 그 부자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도 헌금하라고 하면 다들 떠나가는데, 늘 새벽기도회를 나오던 그 여종이 결국은 믿음의 본을 보이고 떠난 것입니다. 얼마나 피땀흘려 모은 적금이겠습니까?! 성령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감동대로 성령을 따라 행한다면, 자연히 교회는 부흥할 줄 믿습니다. 자연히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