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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들

갈라디아서 4장 21~31절 설교

* 성경봉독 : 갈라디아서 421-31

약속의 자녀라

바울의 전도의 자세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사도행전 마지막 2831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담대하게 거침없이. 우리도 바울처럼 전도도 삶도 거침없이 담대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문제를 풀려면 문제로 돌아가라!

성경 넌센스 퀴즈에 보면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부부싸움하고 바로 읽으면 안되는 성경은? (갈라디아서)

우리가 읽은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지역 교회에 유대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와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뿐만 아니라 할례를 받아야 되고, 율법을 지켜야지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문제로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고,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이 갈라디아서를 쓴 것입니다.

바울은 서신서를 보면, 얼마나 논리적이고 분명한 지식을 가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엘리트였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의 문제를 꿰뚫어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갈라디아교인들에게 율법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이 이 율법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 지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바울은 율법에 관해서 직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해서만 얘기하지 않습니다. 율법을 이야기합니다. 율법에 대해서 전문가입니다. 그는 문제의 실마리를 율법에서 풀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자신에게 딴지를 걸고 있고, 율법으로 인해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의문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과 자신이 전한 복음에 관해서 풀어서 설명합니다. 그 비유가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우리가 말씀 본문으로 깊이 들어가기 전에 알아야할 것은, 바울은 문제를 은근슬쩍 피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직시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야 문제가 풀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관계 속에서도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꼬인 문제를 풀고 넘어가지 않으면 더 이상 관계의 발전을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일제 식민지 잔재를 처리하지 못하니까, 독도문제, 위안부 문제가 아직도 미해결되고 있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니까 아직도 가족을 잃고 유골도 못 찾아 슬퍼하는 유가족들이 있는 것입니다. 6.25 한국전쟁의 상처가 아직도 이산가족과 분단의 현실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문제로 돌아와 봅시다. 우리의 영적 상태는 어떻습니까? 괜찮습니까? 성령으로 충만해 있습니까? 뭔가에 짓눌려 있고,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은 문제가 있다는 걸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는 정말 신실한 믿음의 사람인가?! 솔직하게 볼 때 자신의 부족함과 죄악됨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의 위선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세상적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가운데 살아가고 있는지 아는 것이고,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직시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릴 때도 그냥 부스러기는 하나님 드리고, 알맹이는 우리가 차지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치 무슨 알라딘의 램프처럼 은혜만을 이야기하면, 다 되는 줄 알고 있다면, 큰 착각입니다. 무슨 잘못을 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넘어간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갈라디아서 6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요한계시록에 보면, 소아시아 일곱교회에 편지한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요한에게 한 메시지를 보면, 계속해서 나오는 것이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행위를 따져보시고, 무섭게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만 나오면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왔지만, 예배에 집중을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교회에 와서 사람만 보고 간다면 왜 나온 것입니까? 하나님을 만나고 가야지요.

홍수에는 마실 물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은 사방에 가득한데 마실 수 있는 물이 없습니다. 지금이 그와 같은 시대인 것 같습니다. 설교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냥 핸드폰으로, 컴퓨터로 미국이든 영국이든 원하는 목사님의 설교를 마음껏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마실 물이 없어서 갈급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생수를 주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런데 우리는 왜 사람을 보며 살고, 사람이 없으면 죽을 것처럼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우리 주님을 만나고 가야지요. 생수를 주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영적 상태는 어떠한 문제를 갖고 있는지 직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바울이 한 일은 적을 아군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회당에 들어가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복음주의자로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율법이 다 복음을 위해서 왔다는 것을 가르쳐줬습니다. 그러자 교회가 생겨나고, 하나님의 복음이 든든하게 세워진 것입니다. 바울은 피하지 않았습니다. 정면승부했습니다. 우리가 아플 때도 보십시오. 아픈 부위가 있는데 그 주변 만을 가지고 이야기해서는 절대 병이 나을 수가 없습니다. 병의 근본인 환부를 치료하지 않으면 결코 낫지도 않고 재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문제를 직시하고, 거기서부터 문제를 풀어가는 지혜로운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21~28)

바울이 율법과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비유적으로 끌어온 이야기가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입니다. 이 말씀이 21절에서 28절까지 나오는데요. 계속 대조법으로 이야기하는 바울을 보게 됩니다. 이스마엘과 이삭, 하갈과 사라, 육체로 난 아들과 약속으로 난 아들, 지상의 예루살렘과 하늘의 예루살렘.

약속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유업입니다. 율법에 종노릇하는 자는 결코 없을 수 없는 믿음의 유업입니다. 우리 아버지에게 자산이 1조가 넘는 큰 회사가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회사에 수많은 직장인들이 수천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아들은 나 하나뿐입니다. 지금 똑같이 일하고, 고생하고 있지만, 그 회사는 훗날 누구의 것입니까?! 바로 아들인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종과 아들의 차이는 이처럼 엄청난 것입니다.

약속의 자녀에게는 하늘의 상을 받기로 예비되어 있습니다. 율법의 자녀, 육신의 자녀에게는 밖으로 내쫓김을 당하게 될 뿐입니다. 또한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의 다른 차이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육신의 자녀인 이스마엘은 자연출생한 아들이고, 약속의 자녀 이삭은 자연을 거슬러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이 차이는 너무나 큽니다. 이것을 좀 더 쉽게 풀어 설명하면, 건강한 젊은 여성이 아이를 낳은 것과, 노년의 여성이 아이를 낳은 것의 차이입니다. 좀 실감이 나십니까?

그 두 아이의 출생을 볼 때, 첫 번째 경우는 그냥 축하한다. 수준이지만, 두 번째 경우에는 하나님이 하셨다는 고백이 담겨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첫 번째 경우는 사람의 노력으로 한 것이지만, 두 번째 경우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약속의 자녀의 특징은 하나님이 하셨다는 고백이 담겨 있고, 하나님의 은혜임을 안다는 것입니다. 정말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날마다 체험하는 것이 약속의 자녀입니다. 일상 속에서 감사가 넘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전도를 잘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사람이 전도를 더 잘할 것은 두 말하면 입 아픕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일상가운데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약속의 자녀에게는 핍박이 반드시 있다. (29)

우리가 고난받는 것이 정상입니다. 박해받는 것이 정상입니다. 악한 마귀는 믿음의 사람을 공격하고 유혹하고 시험에 들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변변찮은 사람은 알아서 고난 없이도 믿음을 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냥 두면, 믿음 생활 잘할 것 같아서 가만 두지 않고 고난과 시험과 박해를 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보면, 평탄한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얼마나 고생 고생했는지 보십시오. 고린도후서 1123-25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말도 못하게 죽을고생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이러한 고난이 있기 마련입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의 삶에 고난이 없다면, 우리가 제대로 복음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돌아봐야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고난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 살면 편합니다. 우리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불편하고 힘듭니다.

지금 죽을 것 같은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성도님이 있다면, 제대로 가고 있습니다. 더욱 앞으로 전진해 나가십시오. 곧 그 고난 뒤에 찬란한 영광이 날이 있을 것입니다. 폭풍우 뒤에 맑은 하늘이 있듯이, 저 구름 너머에 찬란한 해가 비취듯이 우리 주님 뵈올 영광의 그 날을 바라보면서 오늘도 정진하시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