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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들

갈라디아서 4장 8~20절 설교

* 성경봉독 : 갈라디아서 48-20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오늘 말씀은 바울의 새로운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이전까지 딱딱한 말씀교사, 교리교사로서 질책하는 바울이었다면, 오늘 전체적으로 다룰 바울은 감정적으로 갈라디아교인을 너무나 깊이 생각하고 관심을 갖고 있는 바울이기 때문입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로 인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교인들에게 (8~11)

우리가 같이 읽은 이 갈라디아서는 그냥 글자 그대로만 읽을 것이 아닙니다. 그 상황과 배경을 이해하고 보면, 더 은혜스럽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처음 했던 1차 선교여행은 갈라디아지역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돌에 맞아 죽을뻔하다가 살아난 경험도 있습니다. 그 일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일을 잊겠습니까?!

존 뉴턴도 노예무역을 했는데 풍랑을 만나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간구해서 겨우 목숨을 구하고 나서 이제 예전의 모든 것들을 청산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같은 죄인 살리신...” 그 아름다운 찬송을 쓰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받게 됩니다.

오늘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삼일동안 눈이 멀게 됩니다. 눈 앞에 캄캄한 어둠 밖에 없습니다. 죽은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다시 눈을 열어주시고, 살려주셨습니다. 인생의 제2막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경험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잊지 못합니다. 바울도 그 갈라디아교인들을 향한 죽을 고생을 잊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그 교회가 얼마나 귀하고, 성도들이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그렇게 힘들게 세운 교회이고, 그렇게 얻은 성도들인데 얼마나 귀했겠습니까?! 바울은 그들에게 다시 율법주의자가 되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이 복음을 증거할 때를 보면, 참 나름대로의 전략과 방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늘 어느 도시를 가든 먼저 그 도시의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회당중심의 선교를 한 것입니다. 바울은 회당을 중심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지만, 결국에는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당시의 회당은 유대인 성인 15명 정도만 모여도 회당, 시나고개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디아스포라 유대인.. 멀리 타국에서 지내는 한인사회를 생각해보십시오. 외국인들 속에 사는데 유대인들이 모여서 신앙을 지키는 곳이 바로 회당입니다. 이민사회를 형성한 것입니다. 그 회당은 유대문화와 신앙의 중심지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머문 사람들 중심입니다. 그 좁은 이민사회에서 눈밖에 나면 얼마나 괴로울까요?! 얼마나 외로울까요?! 얼마나 눈치보며 사는 인생이었을까요?

그런 유대인들에게 바울은 복음을 전합니다. 오직 너희들의 공로와 형식, 회칠한 무덤같은 행실이 아니라, 오직 마음으로 믿음으로서 구원받을 수 있다!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사람의지 하지 마십시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의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약함, 가시 (12~18)

형제들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실제적인 예를 하나 던져주는 것이 있습니다.

12절 말씀에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사실 바울의 모습이 어떠했느냐를 보면, 잘생기고, 건강하고,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 스스로도 육체의 약함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3~14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바울의 모습은 육체의 약함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그랬습니다. 뭔가 부족해보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에게는 이 육체에 가시가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말라리아나 열병 때문에 생긴 육체적인 결함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안염에 걸렸다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간질과 같은 질병일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질병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육체적인 질병은 외적으로 분명히 드러나 보이는 것과 그것을 볼 때 바울의 약함을 알 수 있다는 것이고, 바울이 전도하는 동안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약함으로 인해 바울은 더 강함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 있게 되고, 교만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갈라디아 교인들이 보인 바울에 대한 태도는 사실 너무나 성숙한 것입니다. 그러한 육체적인 결함을 갖고 있는 사도 바울을 갈라디아 교인들은 어떻게 대했는지를 보면,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영접하고, 마치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존귀히 여기고 영접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040절 우리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바울의 외모와 육체적인 약함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인들이 얼마나 바울을 천사와 같이 예수님과 같이 영접했는가를 볼 때 그들의 신앙의 태도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교만한 자에게는 시험이 올 뿐입니다.

목회자를 향한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말을 하기는 참 조심스러운 것도 있지만, 목회자에 대한 인식이나 권위가 땅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삯군 목자라고, 목사가 아니라 먹사라고, 너무나 인간적으로 바라보고 대합니다. 그러한 목사가 말씀을 전할 때 은혜받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에는 다 자기 손해입니다. 교회와서 은혜 못받고 가면 얼마나 손해입니까? 그런데 외적으로, 외모로 볼 때 볼품 없어 보여도 하나님이 세운 사람이 바로 우리 목사님이다. 생각하고 영접한다면, 목사님을 볼 때마다 얼마나 은혜스럽겠습니까?!

목회자가 왜 공대받고 존경받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 여김받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잘나면 뭐 잘난게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믿는 그 믿음으로 목회자를 볼 때 섬기게 되고, 존경하게 되고, 공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을 이렇게 대하니까,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뭐라고 지칭하는지 아십니까? 오늘 말씀 19절 같이 읽겠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자녀들이라고 대합니다. 자신이 아버지요 어머니가 되어서 교인들을 양육하고 기른다는 것입니다. 해산하는 수고를 할 정도로 사랑을 갖고 대한다는 말입니다. 어디까지 그 수고를 하느냐?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죽을 때까지 하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이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계기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왜 이 갈라디아서를 썼습니까?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 율법주의자들, 거짓교사들 때문에 교회에 문제가 생기고, 바울이 거짓사도라는 말이 나돌고, 교회가 갈라지게 생겼으니까 바울이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비록 갈라디아교회와는 많이 떨어져 있지만,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바로 20절 말씀에서 따왔습니다.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떨어져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너희와 함께 있는 것처럼 말하겠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데 아프리카 속담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혼자 신앙생활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함께 신앙생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혼자 성경읽는 것은 아무렇게나 읽어도 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함께 합독할 때는 서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같이 읽어야 됩니다. 국군의 날 행사 때 싸이의 공연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뒤에 백댄서가 나오고 수많은 군인들이 나오는데.. 사실 그 많은 사람들이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훈련의 시간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한다는 것은 그만큼 쉽지 않고 어려운 일입니다.

바울은 그 어려운 길을 택합니다. 혼자만 잘먹고 잘살고, 구원받는 길이 아닌, 세계 열방의 이방인들을 품고자 달려갑니다. 영생의 길, 그 멀리를 내다보며 큼직한 한 걸음을 내 딛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이제 잘 살기 위해서는 이제 고령화문제와 저출산 문제에 관심을 갖아야 합니다. 남과 북이 잘살기 위해서는 비핵화문제 평화통일의 문제에 관심을 갖아야 합니다. 인류가 이제라도 잘 살기 위해서는 환경문제, 지구온난화 문제에 관심을 갖아야 합니다.

교회가 더 든든히 세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구원의 중요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땅의 생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한비야의 책 중에 “1그램의 용기란 책에 보면, 성경이야기가 나옵니다.

홍해의 기적도 모세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한 발자국을 내딛었기에 이루어졌다” “진정한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이다.” 1그램의 용기만으로도 우리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새생명축제를 준비하는 이 때에 저와 여러분에게 이러한 1그램의 용기가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이웃을 향한 긍휼의 마음으로, 나 자신의 자아를 깨는 한 발자국의 전진으로 한 걸음 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