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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들

갈라디아서 3장 1~14절 설교

* 성경본문 : 갈라디아서 31-14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갈림길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가든지 아니면 왼쪽으로 가든지 둘 중 한 길을 선택해야하는 것입니다. 직장에 들어갈 때도, 사람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선택의 기로 앞에 서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인생은 늘 선택의 연속입니다. 무슨 일을 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두리번 두리번 거리고, 망설이다가 버스가 떠나 후회할 때도 있고, 성급하게 내 마음대로 했다가 돌이킬 수 없는 나락에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갈라디아교인들이여 율법의 행위를 따르겠느냐?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써 복음을 따르겠느냐?”

이것은 지금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앙에 있어서도 율법의 행위를 사실 더 따를 때가 많습니다. 은근히 그 행위를 자랑하는 것도 없지않아 있습니다. 대단한 신앙을 소유한 분들도 있습니다. 정말 교회 일이라면 자기 집 일처럼 열심히 봉사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있는지 모릅니다. 교회에 와서 몇 시간동안 기도하고, 방언하고,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헌금생활을 얼마나 철저히 잘하시는지 모릅니다. 헌금액에 따라 믿음도 사실 비례한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부흥회에 와서 하는 이야기가 자기는 심방 안다니고 헌금생활 잘하는지 그것만 본다고 합니다. 그래서 평소보다 십일조 적게 하면 좀 어려운 가 보다하고 심방가고, 아예 헌금을 안하면 바로 찾아가서 기도해준다고 합니다.

헌금 생활하느냐 안하느냐를 놓고 믿음이 크냐 적냐를 따지는 것입니다. 사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부자라고 해서 헌금 많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해도 피눈물흘리면서 모아서 하나님께 헌금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헌금하는 행위로 그 사람의 믿음을 평가하고 구원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리석도다!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사는 삶, 믿음 안에 사는 삶이 무엇인지 알려 준 이후에 오히려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대놓고 말합니다. 돌려서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바보야~ 왜 귀가 얇아서 거짓교사들의 속임에 그렇게 쉽게 넘어가냐?!” 왜 율법의 행위의 증표인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율법교사들의 말에 넘어가느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우리를 구속하셨거늘 왜 이전으로 돌아가려고 하느냐? 직언하는 것이죠.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을 보고 많이 답답하고 안타까웠던 것 같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써 성령의 약속을 받고, 구원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복음을 듣고 믿은 이후에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퇴보해서 율법의 행위를 쫓아서 할례를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면서 주일예배를 드리다가, 구약성경을 읽어보니까 십계명에 안식을 거룩히 지키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제칠일안식일교회에 다녀야겠다.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려고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면, 왜 구약의 율법대로 제사를 안드립니까? 소나 양을 잡아서 각을 뜨고, 뿔에 바르고, 완전히 태워서 번제도 드리고 해야하는데 왜 구약의 제사법대로 드리지도 않으면서 안식일만 지키면 다 율법을 지키는 것처럼 생각합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퇴보하느냐 이겁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교인들을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의 첫 선교여행지가 어디였습니까? 갈라디아지역이었습니다. 첫 고난과 죽을뻔했던 곳이 갈라디아지역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계속해서 방문했던 곳 중에 한 곳이 갈라디아지역이었습니다. 거기서 디모데도 만나고, 장로 가이오도 만나고, 선교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배운 곳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어렵게 고생해서 세운 그 교회가 율법의 행위로 퇴보해가는 것을 볼 때 얼마나 가슴이 무너졌을까요?!

여러분이 전도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신실하게 신앙생활하다가 나중에 이단에 빠졌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안타깝습니까우리 자녀가 고등학생인데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중학교로 입학한다고 하면 얼마나 부모 마음이 찢어지다 못해 화가 나겠습니까? 지금 바울의 심정이 그와 같습니다. 그렇게 침이 튀어가면서 복음을 증거했는데 율법의 행위를 쫓아가는 갈라디아교인들을 보면서 화가 나서 외치는 것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사도 바울의 마음이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애쓰고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고, 설교를 해도 어리석도다! 갈라디아교인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누가 너희를 꾀더냐?

줏대없이 신앙생활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람들 말에 현혹되어서 뭘 해야지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에 넘어가버립니다. 권사쯤 되면 방언해야된다. 할례를 받아야지 구원받는다. 헌금해야지 교회에서 낯이 선다. 봉사많이해야지 인정받는다.

바울은 그 모든 행위와 율법 보다 무엇을 봐야 한다고 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예수님을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금 당장 손에 잡히고, 물질적이고, 가시적이고, 행위로 드러나는 뭐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는 그 믿음.. 그 믿음으로 살아야 된다고 말합니다. 부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은혜받고 기쁨으로 사는 것이 율법의 행위에서인가? 듣고 믿음에서인지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율법과 믿음은 여러분 평생 씨름해야할 문제입니다. 직분을 받을 때도 씨름해야 합니다. 신앙생활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충격요법을 쓰고 있습니다. 정신이 바짝 들도록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군인정신을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군대에 가면 사람이 얼마나 달라지는 지 모릅니다. 아침에 그렇게 게으른 사람들도 군대에 가면 일찍 일어납니다. 걷는 것도 달라집니다. 보폭 맞춰서 걷고 오와 열을 맞춰서 걷습니다. 인사하는 것도 자세와 목소리가 달라집니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달라지는 지 아십니까? 충격요법입니다. 처음에 훈련을 받는데 교관이 불호령을 내리는데 정신이 바짝듭니다. 얼마나 무서운지 자세를 바로 세우고, 땀흘리면서 집중해서 배웁니다. 죽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배우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귀에 쟁쟁한 것 같습니다. “정신차려~! 똑바로 안해? 자세 봐라~ 엉덩이에 힘주고, 눈에 힘주고 집중해라교육받을 때도 교관이 주목하면 정자세에서 전부 교관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쳐다봅니다. “바로하면 다시 앞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하기를 10번을 했습니다. 될 때까지 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교인들을 깨우친 것처럼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도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오늘 이 시간 우리 예수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십자가를 주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꾀임에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의 날개 그늘 아래 머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6절 이후에 바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서 갈라디아교인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거짓교사들이 주장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려면 할례를 꼭 받아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지켜야 되는데 그 중에 가장 대표되는 것이 할례입니다.

아브라함하면 믿음의 조상입니다.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모두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깁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을 들어서 설명을 하는데 사실 갈라디아서 보다는 로마서에 더 정확하고 자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47~ 12절 말씀 같이 찾아서 한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받은 때가 언제입니까? 할례를 받은 때입니까? 할례를 받기 전입니까?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이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해서 의롭게 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15장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17장에서 할례를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로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믿었기 때문에 의롭게 여김받는 것이고, 믿음의 완성의 표징으로서 할례를 받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무엇으로요? 믿음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믿음은 귀한 보석인 그리스도 예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붙잡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다는 것은 믿기만 하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믿기만 하면 구속의 은혜를 누리고, 대속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믿기만 하면 율법에 나온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님께 절대 충성하겠다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사실 인격적으로 안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요. 일평생 부부로 살았던 그 한 사람도 죽을 때까지 무슨 생각으로 살았는지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신앙상태가 어떤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물어보면, 머뭇거리는 분들이 여럿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안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일까요? 예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꿈과 환상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까? 기도하면 알 수 있습니까? 오직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온 예수 그리스도.. 그 하나님의 비밀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번 청년부 수련회에서 집회 말씀을 전하면서 성경을 다 읽어본 청년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습니다. 열 명도 안되는 청년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복음서를 다 읽어본 청년 손을 들어보라고 하니까 열명 정도되는 청년들이 손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수련회에 조별로 모임을 갖으면서 복음서를 읽게 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성경을 펴놓고 읽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조장이 복음서 내용을 요약해서 가르치고, 그 말씀에서 깨닫는 것들에 대해 질문 몇 가지를 던져주고 이야기를 나누게 했습니다. 그냥 예배 드리고, 찬양을 통해, 설교시간에 들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 말고, 스스로가 성경을 읽고, 스스로가 성경말씀을 묵상해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갖은 것입니다. 캠프파이어 시간에 수련회 소감을 발표하는데 몇 몇 청년이 이 조별 모임시간이 좋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늘 사람을 통해 누군가를 통해, 목사님을 통해 듣던 그 말씀을 자기가 직접 대면하고 읽으니까 감회가 새로웠고, 새로운 은혜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교인들에게 새로운 복음을 제시했는데 그들은 옛날의 고리타분한 율법, 법으로 자신을 옭아매고, 정죄하고, 행위와 공로를 따지게 했던 그 율법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책망하고, 깨우쳐주면서 다시 복음으로 살도록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뭐라도 해야지 될 것 같다는 생각은 누구나 은연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우리가 뭐 잘나서 뭘 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해주셨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베풀어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힘입어 우리가 이 시간 나온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보혈을 의지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못삽니다. 그런데도 오늘 하루 힘겹게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올라가실 때 사실 이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지 않고 가시지만, 이 날에는 사마리아 수가성을 지나서 올라가셨습니다. 그 곳에서 한 여인을 통해 수많은 사마리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죽지 못해 사는 여인이었습니다. 남들 눈 피해 그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쬐는 정오에 물을 길으러왔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살기는 살아야 겠고, 남들은 만나기 싫어서 그런 것이죠. 그 한 여인을 위해 예수님이 그 부정하다는 사마리아 지방에 왔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그 여인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여인이 찾아서 예수님을 알고 믿게된 것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찾아가서 자신을 알려주고 믿게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이 찾아가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지금 이 자리에도 오신 줄 믿습니다. 그 여인과 같이 죽지못해 사는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지금도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 눈을 들어 찾고 계십니다. 남모를 고통에 신음하고 죽어가는 그 영혼을 위해, 율법에 매어 정죄받고, 상처받고, 신음하고 있는 그 영혼을 위해 복음을 들고 오신 것입니다.

그 주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가 해야할 것은 딱 한가지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마리아 여인이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고 사람들을 향해 나아갔듯이 우리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인생을 살게되고 구원의 감격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사마리아 여인이 자기의 자존심, 수치심 다 내려놓고 달려 나갔듯이 우리도 예수님이 가장 귀한 분임을 깨달았을 때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위해 헌신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삶이란 이러한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얼마나 큰 기쁨과 얼마나 큰 능력이 나타나는지 모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인생의 놀라운 변화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완전 사람이 뒤집어져버립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고, 미쳤다고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간절히 뵙기를 청해서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를 불러다가 사용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의롭게 되고, 새사람되어서 이제는 주님의 사람으로 쓰임받게 된 것입니다. 그 시작은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이 새롭게 시작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믿음으로 말미암아 옆에 있는 분들을 바라보십시오. 달라보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붙여주신 사람들,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람들, 나를 그렇게 힘들게 하던 사람도 하나님이 나를 훈련시키시기 위해 보내주신 것을 볼 때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