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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들

갈라디아서 3장 15~22절 설교

* 성경봉독 : 갈라디아서 315-22

하나님의 약속

정민 교수가 비슷한 것은 가짜다라는 책에 보면 연암 박지원의 글에 관한 것이 나옵니다.

연암 박지원 선생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무리 지극히 미미한 물건, 예컨대 풀이나 짐승이나 벌레라도 모두 지극한 경지가 있으니, 조물주가 만든 자연의 현묘함을 볼 수가 있다

*약속의 의미와 중요성, 예화

이전에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찾아와서 할례라는 증표를 받아야지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를 하자 그 다른 복음에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할례를 받아야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여김받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바울이 아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믿는 것이 먼저였지 할례가 먼저가 아니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응답해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지, 17장에서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이제 할례 문제를 떠나 율법의 약속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15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인간적으로 사람의 언약, 약속에 관해서 생각해보자는 말입니다. 서로 한 번 정한 약속은 바꿀 수 없다는 말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이에게 무언가 약속하면, 반드시 지켜라. 지키지 않으면, 당신은 아이에게 거짓말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된다

랄프 왈도 에머슨

누구나 약속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약속을 이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카네기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한번 약속한 일은 상대방이 감탄할 정도로

정확하게 지켜야 한다. 신용과 체면도 중요하지만 약속을 어기면 그만큼 서로의

믿음이 약해진다. 그러므로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

사람의 약속은 서로에 대한 믿음과 직결됩니다. 가정을 이루는 것도 약속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그것을 성혼서약이라고 말합니다. 이 약속이 깨어질 때 가정에 위기가 찾아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은 양심이라는 사회적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부터 아이를 도와주는 것, 교통신호와 질서, 하찮은 쓰레기 버리는 것까지 양심이라는 기본 약속이 전제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당연한 것이기에 누구나 지켜야 하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이 약속이 있기에 사회가 안전하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는 성경도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입니다.

구약은 영어로 Old Testament, 신약은 New Testament 라고 합니다. 옛약속, 새약속 이라고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약속의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 약속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의 책, 신약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사역에 관한 책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앞으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재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이 말은 하나님이 정하신 언약, 아브라함과의 언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사백삼십년 후에 모세가 나타나 출애굽을 하게 되는데 구약의 첫 다섯책이 모세 오경이잖아요. 이것이 율법입니다. 이 율법이 나기 전에 이미 하나님과의 언약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나중에 생긴 이 율법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한다고 바울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주시고,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또 율법이 그 하나님의 언약을 반대하는 것이냐? 또 그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고, 사람의 죄가 무엇인지 그 기준을 제공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바울이 이 이야기를 갈라디아교인들에게 하고 있습니까?

무엇이 먼저 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 율법의 틀 안에 갇히게 되면, 그 율법의 행위와 할례에 머물게 되면, 복음의 진리는 잃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매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입니다. 예배도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그 시간에 하나님께 나의 시간과 생명을 드리겠습니다. 하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 잘 지키고 있습니까? 혹시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상황 때문에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시간은 사람들과의 약속이기 이전에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 예배를 칼같이 지키는 사람들을 보면, 참 신앙생활 신실하게 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 예배를 드리고, 지켰다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예배드렸다는 예배행위 자체에서 내가 신앙생활 잘하고 있구나 안도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일주일에 하루 하나님께 예배생활 지켰다고 예배에 성공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들고 나아가 세상 가운데 사는 나머지 육일 동안의 생활에서 예배의 은혜를 갖고 나누지 못하면 예배 생활에서 실패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행위 자체에 얽매이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은 주일예배 그 몇 시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생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율법의 역할 :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다.

22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여기서 성경은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이 아닙니다. 바울이 살 때에는 신약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 나오는 성경은 다 구약을 말합니다.

이 구약성경의 율법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고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율법의 역할은 죄를 드러내고, 죄 아래 가두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사람에 관한 사랑과 생명 이런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무섭습니다. 냉정합니다. 돌로 치고, 죽음에 이릅니다. 율법은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합니다. 그 전에는 그것이 죄인지도 모른 채 살았는데 율법을 통해 그것이 죄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약속을 주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을 잘 지키지 않기 때문에 그 전에는 구두, 언약으로 하시다가 이제 글로써 약속을 한 것이 율법이 된 것입니다.

구약성경이 전래된 것도 참으로 기적입니다. 이 전에는 입에서 입으로 구전으로 전해지다가 이게 글로 문서화 돼서 성경으로 쓰여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공동체놀이할 때 한 문장 글자보고 옆에 사람 전달하기 하잖아요. 그럼 몇 사람 지나면 어떻게 되요? 다 틀리게 되죠?

그런데 구약시대 구전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는데 그것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 중에 기적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성경을 주셨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도 약속을 안지키고 범죄하니까 하마르티아~ 자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못하고 과녁을 벗어나니까 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그 말씀을 주실 때도 사랑의 마음으로 주셨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지켜야 이스라엘이 살 수 있고, 신앙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율법을 가지고 지키도록 해야 하는데 안지키는 이들을 정죄하는 도구가 되어 버립니다. 사랑이 심판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금 주신 계명,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율법을 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유래 율법주의로 돌아가려는 것을 보고 바울이 답답해서 지금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다시금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죄를 깨닫게 했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참 자유와 해방을 얻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너희를 옭아매고 있는 죄로 부터의 자유, 너희를 짓누루고 있는 무거운 짐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418 ~ 1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서 이사야의 글을 읽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눈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원래 이사야 612절 말씀에는 좀 다르게 나옵니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보복의 날을 선포한다는 말을 빼고, 은혜의 해를 전파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대속하심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해를 전파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유월절처럼 Passover 죽음이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증거합니다. 복음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말하고, 율법의 행위와 할례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구원을 얻는 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온 하나님의 약속을 날마다 듣습니다. 이 약속 아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오히려 더 철저히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게 합니다.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약속대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 우리는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지켰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약속의 땅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손의 번영을 허락하셨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지킬 때 우리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됩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됩니다. 이 땅 가운데서도 병이 나음을 얻고, 지위가 회복되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칭함을 받고, 평강과 은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 가운데 일생을 살면서 이 주님 약속하신 말씀위에 서서 살아야할 줄 믿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흔들 때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세상 염려가 내게 엄습할 때에 이 약속을 믿고 굳게 서십시오.

세상에 가진 것 없고, 너무나 외로울 때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승리하십시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님 약속 위에 설 때에 우리는 죽음도 무서워하지 않고, 세상의 환란과 풍파도 능히 이길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 찬송가 546장 다같이 부르고, 잠깐 기도하는 시간 갖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