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들

갈라디아서 2장 15절(믿음 안에서 사는 삶)

설교본문 : 갈라디아서 215-21

믿음 안에서 사는 삶

구원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구원의 3단계 칭의 성화 영화입니다.

예수 안에서 의롭다 칭함받고, 거룩한 삶을 살다가 영화로운 영생의 삶까지 나아가는 것이 구원의 단계입니다.

그런데 칭의 이전에 먼저 우리가 깨달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허물 많은 존재요 실수투성이의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투성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깨달았을 때 우리가 해야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완전하신 그 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이 우리의 허물을 덮어주시고,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눈물 쏟게 만드시는 그 분을 만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갈라디아서 220절 말씀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지금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명확하게 알려주는 지침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믿음 안에서 사는 삶(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는 죽어도 행복합니다>라는 책에 보니까 이중표 목사님은 이 말씀을 가지고 별세신앙의 신비와 감격을 증언하며 목회인생 최대의 사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이 자신을 살렸고 또 한국 교회 그리스도인들을 살릴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선한목자교회 유기성 목사님이 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에 보면 오늘 말씀을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것은 주님께 놀랍게 쓰임받았던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자신도 사도 바울과 똑같이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데 왜 내 삶에는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 결정적 차이 역시 이 고백에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삶의 주도권을 내어드리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이렇게 고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은 나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나의 자아가 죽을 때 비로소 예수님과 함께 살아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힘들어하는 것은 나의 자아가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이 아직도 주인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내 계획, 내 비전, 내 유익이 먼저입니다. 나의 감정과 나의 생각이 먼저입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예수님의 계획과 비전과 뜻은 다음 순위로 밀려나게 됩니다.

그런다고 내 뜻대로 되는 게 있나요? 매일 좌충우돌하고, 사고가 터지고, 일은 안풀리고, 여러 가지 경제적인 문제, 건강의 문제, 관계의 문제에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제목을 봐도 항상 내 기도만 합니다. 다른 이들을 위한 기도를 안해요. 중보기도는 내 기도가 다 응답받은 이후에나 하지. 그 전에는 잘 안합니다.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만 놓고 기도하지... 저기 아프리카 선교사나 죽어가는 난민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는데 나는 날마다 나의 나라와 나의 의를 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직 내가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내가 죽지 않고도 사역은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운 것입니다. 여러분, 안무섭습니까?!

주님의 사역을 한다고 하는데 내가 아직도 살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역하고 있다는 사실..

오늘 말씀처럼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것은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죽은 자는 화를 낼 수도 없습니다. 죽은 자는 억울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억울하고, 속상하고, 섭섭한 것이 있다면, 아직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철저히 나는 죽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을 비우라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의 자아가 죽는 것이고, 나의 육신이 죽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보다 십자가에 죽는 것이 먼저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수많은 고난이 찾아오는 것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먼저 죽이는 작업중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별세의 신비, 그리스도인의 능력의 역사, 믿음의 성장은 먼저 내 자신이 죽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 나타나는 현상

내가 죽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나는 분명히 지금 살아서 움직이고 말하고, 먹고, 사람도 만나고 있는데..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나를 이끄시고, 나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감동을 주십니다. 약한 자들을 돕고, 섬기라는 감동 말입니다. 나의 유익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헌신하라는 감동말입니다. 나보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수고합니다. 나의 시간을 내어 봉사하고 섬깁니다. 예전에는 대접받기만을 바랬는데 이제는 대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 주님이 감동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감동을 주시면, 무명으로 그냥 돕고 섬깁니다. 미친 것 같은 선행을 할 때도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읽을 때 우리가 늘 생각하면서 읽어야할 것은 율법과 복음에 관한 것입니다.

율법주의에 빠진 사람의 특징은 아직 내가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아직도 나의 가치관이 기준이 되는 것이고, 남을 정죄하는데 더 관심을 쏟는 사람입니다. 외적인 완벽주의를 추구하며,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는 경향이 다분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다는 것은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시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참 기쁨이 되는 것이고 자발적인 순종을 합니다. 자기 자신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더 소중히 여김으로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깁니다. 외적인 면보다도 오히려 내향적으로 더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경향이 강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18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우리가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주기 마련이지만, 무엇보다 그 이면에 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기준점은 딱 한가지입니다.

지금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면 천국의 삶,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없으면 내가 주인되어 살면서 전전긍긍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우리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 성화의 삶이 영화롭게 펼쳐지는 것입니다.

가슴 아픈 영혼들이 눈에 들어오고, 어려운 분들을 찾아가 주님의 사랑을 베풀고, 환우들을 놓고 기도하게 되고, 새가족을 품고 말씀으로 양육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 속에 나타나는 특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예배생활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예배생활에 성공한다는 것은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예배생활성공한다는 것은 그냥 주일예배, 새벽기도회,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모든 공예배를 잘하면 예배생활 성공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예배생활에 성공한다는 것은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누구와 함께 모여서 드리는 예배뿐만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신실한 생활을 산다는 말입니다. 다니엘처럼 하루에 세 번 정한 시간에 기도하기도 하고, 혼자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는 기도처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예배생활에 성공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집사님 딸은 민족사관고등학교 다니는 학생인데 식사시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식사 전에 기도를 하고 먹는다고 합니다. 처음에 친구들이 기도하니까 장난처럼 생각하고 건들기도하고, 말을 걸기도하고, 놀리기도 했는데, 이 아이가 식사기도를 하는데 그냥 1분 잠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몇 분을 기도하더라는 것입니다. 엄숙하게.. 하루에 많은 시간을 낼 수 없어 그 시간을 집중해서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한참 바쁜 고등학생이 스스로 식사시간에 기도한다는 것은 왠만한 믿음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 한창 친구들을 의식하며 친구가 제일이라고 여기는 그 나이 대에 그렇게 기도한다는 것은 왠만한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두 번째로는 섬김입니다. 낮아짐입니다. 제가 아는 70대 중반인 한 권사님은 교회청소를 하는데 혼자서 한 시간 전에 미리 나오셔서 본당의자를 다 걸레질합니다. 권사님 건강이 그렇게 튼튼하고 좋은 것도 아닙니다. 얼마나 성실하게 청소를 하시는지 모릅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본인이 은혜받아서 그렇게 청소하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제 시간보다 더 늦게 나오기도 하고, 아예 관심조차 갖지도 않는 일에 그렇게 열심히 봉사하고 섬깁니다.

또 어떤 권사님은 주중에 매주 봉사활동을 나갑니다. 어려운 지체장애인이나 자신의 달란트를 쓸 수 있는 곳에 가서 믿지 않는 분들과 같이 섞여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냥 교회 안에서만 있으면 관계가 좋아지고 협소해지니까 오히려 세상으로 나가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손사래를 그렇게 치십니다.

셋째는 사랑이 넘칩니다. 사랑으로 안아주고, 품어주고, 퍼주고, 넘치도록 부어줍니다.

작지만 그 안에는 따스함이 있습니다. 정말 본인도 가까스로 살아가고, 어렵게 지내는 것 아는데도 불구하고, 도와주시고, 챙겨주십니다. 가끔 그런 사랑을 받을 때는 눈물이 납니다. 떡 한조각을 받더라도 얼마나 감사한지요.

예수 믿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랑이고 나눔이어야 합니다. 좀 더 베풀고 싶고, 좀 더 나누고 싶은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믿다보면, 주변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사랑의 마음을 품고 돕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렇게 만드십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신분이 무엇을 못 내어 주시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사랑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고, 우리도 그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네 번째 특징은 소망의 사람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은 어떤 상황에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이 먼저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소망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소망되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절망이다, 고난이다, 망했다고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승리자 되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죽음을 이기고 승리할 것이란 소망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손에 쥐어진 것이 보잘 것 없을지라도 그것을 통해 역사를 이루어갑니다. 소망의 기적을 이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