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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들

갈라디아서 2장 15~21절 설교

설교본문: 갈라디아서 215-21

설교제목 : 믿음으로 얻는 구원

사실 우리는 정말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라는 책에 보면 이런 글귀가 나옵니다.

매일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보낸 5분은 온 하루를 감사로 바꾸어 놓을 것이며,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은혜로 바꾸어 놓을 것이며, 나 자신이나 이웃을 위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을 그리스도를 위해 할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다.”

갈라디아서는 마틴 루터가 가장 좋아하는 서신서였습니다. 6장으로 되어진 짧은 편지이지만, 복음에 관해 명확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쓸 때는 늘 똑같은 구조를 담고 있습니다. 전반부에는 인사말과 함께 교리적인 부분을 다루고 후반부에서는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론과 실제로 나누어서 편지를 쓴 것입니다. 로마서도 1~11장이 교리를 다루고 있다면 12장부터 16장까지는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갈라디아서도 1~4장까지는 교리적인 부분, 5~6장은 실천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서신서와는 다르게 갈라디아서에서 만큼은 처음 서두에 감사인사가 빠져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자신의 사도성을 변호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1. 믿음으로 얻는 구원(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죽을 때까지 붙잡은 진리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이신칭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갈라디아서를 쓸 때, 종교개혁시대, 또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율법과 복음 사이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 오래 신앙생활했던 사람들, 뭔가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늘 율법이 꼬리표처럼 따라 다녔습니다. 바울이 있던 당시에도 율법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시대에도 로마카톨릭 사제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율법을 강조하고, 직분을 받으면, 봉사를 하면, 헌금을 많이하면, 인정받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율법을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도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율법의 역할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고 분명한 믿음의 기준을 제시해주는 것인데.. 그것이 나에게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정죄하는 것으로 바뀔 때 우리의 신앙과 교회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율법의 폐해는 정죄하는 것입니다. 오직 비난을 위한 비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바라보지 않고, 오직 남들의 티를 들추어내기에 바쁩니다. 종교개혁시대에도 사람들은 공로사상에 취해 있었습니다. 마치 믿음이 없어도 돈으로 면죄부를 사면 구원받고, 믿음이 없어도 선행을 많이 베풀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에 루터가 반기를 들었습니다.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고, 의롭게 된다. 이것이 복음이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며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31)

바울을 가둔 간수도 믿어서 구원받을 수 있었고, 그 부정하다던 사마리아 사람도 예수를 믿어 구원 받았고, 세리장 삭개오도 예수를 믿어 구원받았고,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선행을 베풀어도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아니올시다가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 당시에는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이방인도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때 바울이 아니다. 할례를 받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헬라인 디도에게 할례를 받지 않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루터도 그 당시에 면죄부를 사야 죄사함을 얻고, 선행을 베풀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눈에 가시적인 무언가를 조건으로 내걸 때,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수십년 교회에서 신앙생활했는데 구원을 못받는다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나 자신을 볼 때 얼마나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지요. 남을 헐뜯고 정죄하고 비난하고 수군수군거리고 하는 죄가 얼마나 많이 있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복음은 이러한 우리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구원은 죽어서 천국에서 누리는 구원이 아니라, 이 땅 가운데서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누리며 사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받는 은혜를 누리는 사람은 날마다의 삶이 기쁨으로 사는 것이고, 덤으로 사는 것입니다. GS25시 편의점가면 똑같은 음료수를 사더라도 1+1을 삽니다. 우리의 인생이 믿음으로 살 때 1+1과 같은 은혜를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거져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믿음과 구원의 감격이 식어지고, 말씀이 율법처럼 되어서 우리의 신앙을 옥죄고 하는 때가 찾아 옵니다. 교회 가는 것이 힘들어지고, 새벽기도 빠질 수 있는 핑계거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게으름과 나태의 죄가 찾아옵니다. 가슴에 열정이 사라지고, 왜 신앙생활하고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신앙생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교회에서 집사, 권사직분은 받아서 남들은 신경쓰이고, 나 자신은 위선자가 된 것 같아서 더 마음이 괴롭고, 교회를 옮길 수도 없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할까요? 그럴 때면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믿음의 본질이요,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 서기보다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정직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도 세상 것 구하고, 삶의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기 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오직 그 분을 생각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잠잠히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그 분의 눈을 바라보시고, 그 분의 손을 바라보시고, 그 분의 발을 바라보시고, 그 분이 달리신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 나같이 허물많고, 이렇게 신앙생활도 제대로 못한 사람을 위해 그 분이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그 분은 포기하지 않으셨지. 도망친 제자들에게 찾아와 평강이 있으라 축복하셨지. 남들은 다 나를 정죄할지라도 예수님은 나를 안아주시고, 받아주셨지.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우리의 주님이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잠잠히 주님을 바라볼 때 다시금 우리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나고, 주님을 향한 눈물이 흐르고, 우리의 믿음과 구원의 감격이 샘솟는 살아날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공부 많이 하고, 아무리 헌금많이하고, 아무리 봉사 많이해도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주는 것도 아니요. 내가 무언가를 해서 주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보면, 다 하나님이 하셨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은 내가 했다고 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내게 이런 놀라운 일을 하셨어~ 고백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 말씀의 중함을 깨달으라

요즘 시대를 생각해보면, 참으로 진지함을 못견뎌하고 가벼움만을 추구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어찌 이렇게 가벼워졌는지 얼굴 안보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친구고, 애인이고, 가족이고 우리는 상실의 시대를 살아간다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즘 왜 그렇게 이혼을 쉽게 합니까? 삶이 힘들어서 그럴까요? 시댁에 시달려서 그럴까요? 결혼의 중요성과 무거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벼운 개그프로에 열광하고, 너무나 가벼운 신앙생활을 선호합니다. 요즘은 주일 오후예배나 저녁예배도 점차 사라지는 추세입니다. 주일 낮예배 한 번 드리고, 이제 가족들과 함께 여행을 가거나 시간을 보내는 것이죠. 주일 하루 전체를 드리기보다 반나절만 하나님께 예배드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예배 시간에 우리는 서서 예배드리는 불편한 것보다 앉아서 편히 예배드리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성경에서 지혜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주님으로 모시고, 그의 말씀을 무겁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사실 설교라고 선포하는 말씀이 얼마나 가벼운지요믿음의 선조들은 신앙생활은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례 받는 다는 것은 욕먹을 각오를 하고, 집에서 쫓겨날 각오를 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몇 개월만 교회 다녀도 세례를 주고 자기 스스로의 신앙고백이 없어도 세례를 줍니다. 교회에 신뢰가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그 만큼 삶의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무겁게 여겼는지 모릅니다. 그 말씀 앞에서 엎드리고, 절규하고, 뒹굴고, 밤을 꼬박새우면서 기도했습니다. 왜 아버지 앞에 아들이 복종합니까? 아버지의 말씀을 무겁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매일 말씀을 듣고 묵상하면서도 삶의 변화가 없는 것은 말씀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능력과 역사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겁게 여겼던 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미쳤다고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죽이려고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무거움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미쳤다고 죽을 자리인 애굽으로 돌아갔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무거움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미쳤다고 삼년 동안 벌거벗은 몸으로 돌아다녔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무거움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미쳤다고 그 좋은 자신의 지위와 학벌과 혈연을 내어던지고 유럽으로 전도하러 갔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 4:17)

우리도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무거움을 조금이라도 알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주신 그 십자가의 무거움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십자가가 안믿는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안믿는 자녀가 될 수도 있고, 안믿는 이웃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중한 것을 깨달았다면, 삶 속에서 순종하셔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라(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니라

바울이 젊은 시절 바리새파에 속해서 밤낮 씨름했던 것은 율법이었습니다. 아주 철저한 규율과 규칙이었습니다. 사람의 생명보다도 안식일 규정을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율법을 공부하고, 율법을 달달 외우고, 율법 그대로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핍박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딤전 1:13)라고 스스로 고백합니다. 자신이 어떠한 일을 했는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다메섹 체험사건은 율법에 대하여 죽는 날이었습니다. 자신이 율법이 되어 수많은 이들을 잡아가두는 사람이었는데.. 수많은 사람을 정죄하던 사람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이제는 율법이 아닌 하나님에 대하여 살고자 했습니다. 죽은 문자로 쓰여진 두꺼운 책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하며 살고자 했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산다는 것은 정죄하며 사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늘 판단하고,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상대방을 재면서 사는 것입니다. 누구는 맘에 들고, 누구는 마음에 안들고, 누구는 신앙이 있고, 누구는 신앙이 없고, 남들의 티는 보면서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사는 삶이 율법에 대하여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산다는 것은 사람을 보지 않는 삶입니다. 사람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보며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왕이든 대통령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너머에 계신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사람은 상황이나 환경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 편지 쓴 것이 바로 빌립보서 인데.. 거기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기쁨입니다. 감옥에 갇혀서 어떻게 기뻐하라고 도리어 권면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하여 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사람의 특징을 고린도후서 4장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린도후서 6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하여 산다는 것만큼 멋진 인생이 있을까요? 이것은 목회자만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중심이 하나님을 향할 때 그 어떠한 고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중심이 하나님을 대할 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곳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대할 때 하박국 선지자처럼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에 대하여 살고 있습니까? 율법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이 세상 그 무엇도 우리의 마음을 채울 수 없으나 오직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사셔서 그 분을 영화롭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가는 귀한 인생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