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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들

갈라디아서 2장 11~14절 설교(베드로의 외식)

성경본문 : 갈라디아서 211-14

설교제목 : 베드로의 외식을 책망한 바울

1. 책망할 일은 책망하라(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보면, 참 기이한 일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에게 책망을 받은 일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이고, 당대에는 가장 권위있는 사도 중에 한사람입니다.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고치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담대히 복음을 전했으며, 베드로의 한 마디로 인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은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는 대제사장 앞에서 담대히 외치기를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사마리아에 내려가 복음을 증거하고, 죽었던 여제자 도르가를 살리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는 고넬료라하는 로마인 가족에게 세례를 주고, 헤롯왕의 감옥에서 천사의 인도를 받아 기적적으로 탈출을 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다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를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이 책망한 것입니다. 그것도 둘이 일대일로 단둘이 있을 때 책망한 것도 아니고, 여러 사람, 특히 베드로를 따르는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 회중 앞에서 책망했습니다. 얼마나 베드로의 마음이 부끄러웠을까요? 아마 멘붕이었을 것입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해지면서 속에서 뜨거운 화가 올라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녀들을 우리가 정말 사랑한다면 책망할 일은 책망해야 합니다.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알려줘야 합니다. 우리가 때로는 고통당하고 뜻하지 않는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나타내보이시기 때문입니다.

한 지혜로운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됩니다. 물고기를 잡아서 어항에 담아서 멀리 떨어진 집에 가는데 집에 도착해보면 물고기들이 다 죽어버리는데 이 때 나이 많은 어르신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어항 속에 물고기의 천적을 한 마리 넣어보라고, 그러자 신기하게도 집에 도착했을 때 물고기 한두 마리는 천적에게 먹혔지만, 나머지 물고기는 싱싱하게 살아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지금도 장어를 멀리 옮길 때는 천적인 상어새끼를 넣어서 옮기고, 모든 성질급한 물고기를 옮길 때는 문어를 집어넣는다고 합니다.

바울의 책망은, 하나님의 책망은 이와 같이 어항 속 천적처럼 우리를 깨어나게 하고, 하나님 앞에 더 살아서 생동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책망받으면 물론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화도 나고, 자존심도 상합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그 책망 속에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보게 됩니다. 배울 점을 찾는 것이고, 그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러한 죽비소리 같은 책망이 귀한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책망하실 때 예수님의 겸손을 생각하시면서 다시 낮은 자의 마음으로, 처음 시작하는 것처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면서 귀한 믿음생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겉과 속이 다른 외식하지 말자(12~13)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사도 베드로가 책망받은 이유는 외식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말과 행동이 다르고, 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에 책망받은 것입니다. 같이 있을 때는 신나게 먹다가도 신경쓰이는 사람 한 사람이라도 오면, 안 먹은 척 했기 때문에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외식은 전염성이 있습니다. 누군가 그런척 하면 자기 자신도 그렇게 해야될 것 같은 마음이 생깁니다. 베드로가 그러니까 바나바도 외식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들이 외식하는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마태복음 23장에만 6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23:28)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성도들 보다 리더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평신도보다도 목회자에게 하는 말입니다. 강단에서는 얼마나 거룩한 척하면서 삶에서는 불법 천지인 목회자들에게 리더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베드로와 바나바에게만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대접받기만 좋아하고, 높은 자리에만 앉으려 하고, 자기는 행하지도 못할 무거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우고, 지도자라 칭함받기를 좋아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2000년 전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지금도 얼마나 우리의 가슴을 찌르는지 모릅니다. 목회자가 낮아져야 합니다. 중직자들이 낮아져야 합니다. 평신도 지도자들이 낮아져야 합니다. 위에 있다고 대접받는 자들이 낮아져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낮아져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낮은 곳에 임하십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시고, 가난한 자들과 나그네와 과부들과 세리들과 창기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죄인들에게 찾아가 그들의 인간성과 하나님의 형상됨을 회복시켜주시고, 중생의 축복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외식은 우리가 높아지려고 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와 하나님 앞에서 다른 것이 외식입니다. 자신이 외식하고 있는가 아닌가는 아이들 앞에 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에 가감없이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들의 신앙을 어떻게 보는 지 한번 물어보십시오. 그래서 외식하는 자가 아닌 낮은 자리에 거하는 신실한 주님의 제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야고보의 영향력(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야고보의 영향력에 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야고보는 그 당시에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과도 같았습니다. 예루살렘의 기둥이요 감독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9절에 보면, 예루살렘의 기둥 세명이 나오는데 그중에 가장 먼저 야고보가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권위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주보를 보면, 뒤에 섬기는 이들이 나옵니다. 거기에 그냥 써 있는 것 같지만, 다 임직 순서대로, 또는 직책 순서대로 나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동생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자라고 곁에서 예수님을 보면서 많은 선한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고, 일평생 살아가면서 행함이 있는 믿음, 살아 있는 믿음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쓴 서신서가 바로 야고보서입니다.

야고보는 살아있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믿음은 행동을 통해 완성되고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사랑의 행위가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제대로 믿기만 한다면, 주님이 주신 은혜 때문에라도 그의 가치관이 변화되고, 생각이 변화되고, 행동이 변화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뜻뜻미지근한 신앙으로, 다시 말해 죽은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그의 삶은 변화되지 않고, 겉으로만 믿는 척하는 외식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외식을 싫어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삶으로 당연히 증명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칭의는 당연히 성화로 귀결이 되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성화없는 칭의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칭의는 오직 나의 공로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죄인에서 의인된 사람은 반드시 삶 속에서 거룩하게 되는 성화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주의 형제 야고보가 좀 성격이 무서운 사람이었나 봅니다. 또한 얼마나 기도를 오래 했는지 야고보의 무릎이 낙타무릎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 야고보에게서 온 유대사람들이 온다고 했을 때 베드로는 잔득 경계하게 되고 이방인들과 같이 식사를 안한것처럼 그 자리를 떠나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같이 밥먹고 식사하면서도 자신은 안하고,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늘 세상 속에서 죄짓고, 죄 가운데 살면서도 우리는 아닌것처럼 우리는 거룩한 것처럼 살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야고보와 같은 믿음의 소유자도 있어야 합니다. 삶으로 보여주는 사람이나 멘토가 있으면 확실히 우리의 믿음도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교인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자신의 부족한 인격을 보지 않고, 대신 자신의 행함을 본받아서 믿음의 길을 걸으라는 것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글 중에.. 서산대사의 눈길을 걸을 때라는 글이 있습니다.

눈을 밟으며 들길을 갈 때 모름지기 발걸음을 어지러이 하지 말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취는 뒤에 오는 이에게 이정표가 되리니...“ 이 말은 백범 김구 선생의 좌우명 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믿음의 이정표가 되고, 믿음의 본이 되는 귀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