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 갈라디아서 2장 1절-10절
설교제목 :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1.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다(6~8절)
“6.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우리를 항상 넘어지게 하는 것이 바로 비교의식입니다. 직분도 그렇고, 사람의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가 세상에서 잘 나가고 성공하면 뭔가 대단해보이지만, 하나님 앞에 서면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직분이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비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할례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가 되었다면, 바울 자신은 무할례자인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삼으셨다는 것 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비교할 때부터 시험에 들기 시작합니다. 마음 속에 불이 일어나고 시기심과 질투 때문에 잠을 못자는 지경에 이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비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21장 20~22절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20.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비교하는 이들에게 네게 무슨 상관이냐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만 따라오면 된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다른 사람들 볼 것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남들 잘되는 것 보고 부러워하고, 비교하느냐 이겁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온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외국에 나가면서 종들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금 다섯달란트와 두달란트와 한달란트를 주고 떠났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는 다릅니다. 시작부터 달라요. 하지만 나중에 셈할 때 보면, 하나님의 결산은 같습니다. 포도원 품꾼이 9시 12시, 3시, 5시에 들어간 사람 모두가 다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셈법이 있다는 것이죠?! 우리 스스로 판단하지 말고, 우리 앞에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2.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9절)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신앙생활을 하면서 누구나 주님을 향한 첫사랑의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 앞에서 눈물 콧물 흘리면서 자복하는 그런 경험말입니다. 몇 시간을 놓고 기도해도, 몇 시간을 찬양해도 은혜와 감격 속에서 보낸 경험말입니다. 이러한 신앙체험이 있는 사람은 여러분처럼 예배를 사모하고, 다시 그러한 첫사랑의 경험을 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예전에 그 뜨거웠을 때는 거의 뭐 교회에서 살다시피하고, 밤이나 낮이나 몇날 몇일을 기쁨 가운데 보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말씀들을 때도 예배드릴 때도 저 뒤에 않앉습니다. 예배 시간 한시간 전에 와서 방석들고 제일 앞자리 앉으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바로 강대상 코 앞에 앉아서 손에 닿을 듯이 가까이 앉기도 했습니다. 늦게 오면, 저 뒷자리 신발들 있는 곳에 앉을 수밖에 없는데 거기서라도 귀를 쫑긋 세우고,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모함이 있었습니다. 부흥회를 해도 3박4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는데 예배당이 차고 넘쳤습니다. 춥고 비좁고 더워도 누구하나 불평함이 없이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았습니다. 차가운 마룻바닥에 무릎꿇고 눈물 뿌리며 기도할 때면, 방언이 터지고, 가슴치며 통곡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어떻게 그러한 열악한 상황속에서도 그렇게 말씀을 사모하고,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각자에게 주신 은혜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를 확실히 알고 체험하게 되니까 지금 처한 육신의 환경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남편이 쫓아오든 말든, 자식들 데리고 와서 같이 말씀을 듣습니다. 못먹고 못살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아니까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 스스로의 은혜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이 받은 은혜고백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에서도 3번이나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다메섹 회심사건, 다메섹 소명사건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자신에게 주신 은혜를 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은혜 이전에 사도 바울이 어떤 자인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가두는 핍박자요, 포행자요, 훼방자 였던 자기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원수였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땅바닥에 꼬꾸라지고, 사흘동안 눈을 못뜨면서 지내게 됩니다. 그러다가 제자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아서 다시 보게 되어 새롭게 태어나게 됩니다. 바울은 이러한 다메섹 소명 사건을 통해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았고, 예수님을 핍박했던 자신을 오히려 이방인의 사도로 불러주신 그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였던 사울을 주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영광된 자리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전혀 자격 없던 사람을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어떠한 것도 주님을 위해 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기만 하면 구원해주시는 그 놀라운 복음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은혜를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전혀 자격없고, 부족하고, 허물많은 저희들을 우리 주님이 택하여 불러주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언젠가 그냥 흙으로 돌아갈 존재인 우리들을 주님께서 부르셔서 자신의 자녀 삼아주시고, 하늘 백성으로 삼아주신 그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도 호흡하고 먹을 수 있고, 걸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생명주신 그 주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 내게 주신 은혜를 알 때 우리는 감사가 넘치고,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게 되고, 사울이 바울이 된 것처럼 새로워지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못산다 못산다 하고, 도저히 그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있습니다. 내게 생명주신 이가 누구인지를 깨닫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 말 안듣고 나쁜 짓하고, 강도짓하고, 남 힘들게 하는 사람도, 그 부모의 말에는 순종하고 마음을 여는 것을 봅니다. 왜 그럴까요? 부모의 키워주신 은혜를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의 은혜를 알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봅시다. 마음을 여는 것부터, 우리의 생각을 고쳐먹는 것부터, 우리의 손을 모으는 것부터 하나 하나 순종해봅시다. 이제 어쩔 수 없이 율법적으로, 의무적으로 하기 보다, 주님이 주신 그 은혜에 감격해서 주님을 예배하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귀한 인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3. 교제의 악수와 함께 구제에 힘쓰다(9~10절)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오늘 9절 말씀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보면,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 나오고,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나옵니다. 이들은 사실 두 교회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앞에 세명의 사도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대표하고, 뒤에 바울과 바나바는 최초의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두 교회의 대표이고 영적 리더들이 서로 교제의 악수를 하였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지 모릅니다. 바울 당시에도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는 아주 심했습니다. 문화적인 차이, 종교적인 차이, 언어적인 차이, 인종적인 차이, 성별의 차이.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를 알기에 함께 교제의 악수를 나누고 서로를 축복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가 함께 행하는 것 한 가지를 이야기했는데 그것이 바로 10절에 나오는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이방인 안디옥 교회에서도 이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고 조건을 붙였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는 곳에 늘 해야하는 일이 바로 이 구제의 사역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든, 이방인 교회든, 이 구제하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사역이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 사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늘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에서 구제하는 일들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제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스데반을 비롯한 일곱집사를 선정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36절에보면,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여제자 도르가도 구제하는 일에 열심히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2절에 보면, 고넬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초대교회 교인들의 특징은 물론 말씀과 기도하는 것도 있지만, 구제하는 일이 참 많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으면서 해야할 것 중에 하나가 구제하는 일입니다. 어려운 이웃들 돌아보고, 기도해주는 일입니다. 그러한 구제가 한 알의 밀알이 되는 일입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없고, 아픈 사람에게 필요하다는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잘 사는 사람에게 아무리 잘해줘봐야 부족할 뿐입니다. 하지만 가난한 자들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하면 얼마나 기뻐하고 감사하는지 모릅니다. 그 모습을 보며 주는 사람이 더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 알게 모르게 힘들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손이 되어서 구제에 힘쓰는 귀한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설교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갈라디아서 2장 15~21절 설교 (0) | 2020.03.12 |
---|---|
갈라디아서 2장 11~14절 설교(베드로의 외식) (0) | 2020.03.11 |
갈라디아서 2장 1~10절 설교 (0) | 2020.03.08 |
갈라디아서 1장 18 ~ 24절 설교 코람데오 (0) | 2020.03.07 |
갈라디아서 1장 11~17절 설교 (아라비아로 간 바울) (0) | 2020.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