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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들

갈라디아서 2장 1~10절 설교

설교본문 : 갈라디아서 21-10

설교제목 : 복음의 검증

1. 계시를 인하여(2)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온 것은 바울 스스로 아쉬울 것도 없고, 사도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함도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구제 헌금을 가지고 가서 돕기 위해서 가기도 했지만, 오늘 갈라디아서 22절 말씀을 보면, 왜 예루살렘에 갔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자신이 전하는 복음에 대하여 사도들에게 제출했습니다. 여기서 유명한 자들이란 바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베드로, 요한과 같은 사도들을 말합니다. 개인적으로 유명한 자들과 사사로운 친분을 맺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가 개인적으로 축구선수 메시와 연락하면서 지내고, 메이저리그 야구선수 추신수랑 SNS하고, 유명인사와 연락하고 아는 사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사도 바울은 유명한 자들과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서 만나고 연락하고자 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람과의 인맥쌓기보다는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있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이고, 그 곳에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검증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누군가를 돕고 싶고,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이지만 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은 가장 자유로운 주인인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종속된 종이다 우리가 오늘 만나는 사람 중에 그 사람이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나그네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종노릇할 때 축복 받았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은혜 받으면 정신나간 선행을 실천할 때가 있습니다. 자기가 지금 할 수 있는 은사와 능력으로 하나님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한 여인이 은혜받아서 어려운 자들을 돕고 구제하는 일에 힘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겉옷과 속옷을 지어서 주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여인들에게 자신이 만든 옷을 선물했습니다. 그녀가 죽음을 당했을 때 수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고, 사도 베드로를 불러와 기도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 여인이 바로 여제자 다비다, 도르가 였습니다. 성경에 유일하게 여제자라고 불려지는 도르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게 합니다. 삶의 가치가 나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 이웃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계획해서 하기 보다 그냥 하나님의 계시, 이상하게 나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그 분의 손길에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기독교의 고전을 쓴 토마스 아 켐피스는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 복음의 검증(2)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한 일은 유명한 자들, 즉 사도들에게 자신의 복음을 제출한 일입니다. 자신이 이방인에게 전하는 복음, 그 십자가 복음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예수님의 사도들이 보았을 때 맞는 지, 틀리는 지 검증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지금까지 사도 바울이 힘들게 전했던 복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고, 앞으로의 선교사역에 있어서도 정말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어떤 상품을 만들어서 우리나라에서 팔고자 할 때 최고의 제품이라는 KS 인증, 한국산업규격이라는 표준인증을 받는 것과도 같습니다.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계기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바울의 사도직은 거짓이라는 소문 때문입니다. 바울의 사도직이 인정받지 못하니까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도 거짓이 되고, 바울이 세운 교회도 깨질 위기에 놓인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교회에 편지를 보내는데 자신이 이 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명한 자들에게도 복음을 검증받았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습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이 때를 위하여 미리 계시를 통해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사도들에게 복음의 검증을 받게 한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사실 이러한 복음의 검증, 믿음의 검증이 필요합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 맘대로 믿고, 내 생각대로 신앙생활하는 것은 언젠가 반드시 시험이 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명확한 믿음, 신앙고백, 교리에 근거한 신앙생활을 한다면,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경동교회에서 목회하셨던 강원용 목사님이 인생 말년에 쓴 <내가 믿는 그리스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과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컨텍스트 이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해서 쓰여진 책입니다. 왜 이 책을 그 늦은 나이에 썼느냐 물었을 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무엇보다 한국교회가 성서에서 증언하는 예수님의 진리와 복음의 빛 아래서 철저히 정화되고 갱신되어야 합니다. 이런 절박한 심정에서 제가 믿고 증언해 온 십자가의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담담히 이야기해보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십자가의 복음 앞에 서야 합니다. 그 누구도 예외는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는 다시 검증받아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 검증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 스스로가 하고 있는 삶과 믿음을 검증받아야 합니다. 자본주의와 물질주의와 환경오염 속에서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그 복음을 믿고 그대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고 있는지 철저히 검증받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 앞에 서 있다면, 그 빛 앞에 서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게 되고, 우리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내가 정말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있는지를 알려면, 내가 얼마나 예수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영광과 나의 자존심과 나의 체면을 위한 십자가가 아닙니다. 나의 유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예수님을 위한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것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녀 키우는 것, 그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교회에 헌금하는 것, 얼마나 당연한 일입니까, 그러나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병든 자, 지극히 작은 자들을 위해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할 때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방법대로해야 합니다. 은밀하게... 어떻게요? 은밀하게 선행을 해야 합니다. 절대 티나게 하면 안됩니다. 박수받으려고 해서는 하나님이 영광받으시기보다 자기 자신이 받기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 우리의 복음과 믿음과 선행을 검증받아야 합니다.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너가 몸이 약함에도 불구하고 내 뜻대로 살고자 몸부림 치고 있구나!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너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사랑으로 선행을 행하고 있구나!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너가 내가 십자가 지듯이 너도 자기를 부인하고 너의 십자가를 지고 있구나!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3. 복음의 진리가 나의 가운데 항상 있게 하라(5)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사람은 외모보다 자신의 마음에 무슨 생각을 품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마음에 품는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면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복음을 제출하고 검증받는 자리에 함께 갔던 헬라인 디도에게 할례를 받게 하지 않았습니다. 외적인 형식보다도 내적인 본질, 즉 복음의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세례받는 것의 의미가 그렇게 깊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초대 기독교에서 세례 받고 교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었습니다. 세례를 받기 전과 후가 너무나 달랐습니다. 세례 자체의 의미가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내가 죽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을 산다는 것이 바로 세례에 담겨 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쉽게 세례를 받지도, 주지도 않았습니다. 일정기간의 신앙생활을 하고, 자기의 입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신앙고백을 할 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청년들 세례 교육을 하다보면, 가끔 군대에서의 이야기를 재미삼아 하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교회에 가서 세례도 받고, 성당에 가서 영세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진중세례식때도 받고 자대 배치 받아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세례받으면 선물도 주고, 맛있는 것도 주고 해서 아무 생각없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형식적으로 받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할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외적인 형식에 치우쳐 받고 안받고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가운데 항상 복음의 진리로 충만케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로 충만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4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올 때 나타나는 것이 주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임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심령 가운데 무엇이 충만해있습니까? 세상의 걱정 근심 염려가 가득하지는 않습니까? 사람에 대한 시험으로 가득하지는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복음의 진리,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케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의 진리가 우리 안에 가득해야 합니다. 그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지면, 우리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은혜받으면 얼마나 기쁜지 그냥 잠자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여러분의 심령이 충만해지길 축복합니다. 주체할 수 없는 은혜를 주셔서 복음을 전하게 되고, 예수님을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항상 계셔서 세상의 가치와 질서에 휘둘리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폭풍우가 몰아치는 중에도 예수님은 잠잠히 평온하게 지내신 것처럼.. 우리 인생의 폭풍우가 몰려올 지라도 우리 중심에 복음의 진리되신 예수님을 항상 모시고 산다면, 우리는 평안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담대해집니다. 만왕의 왕이신 우리 주님이 계시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면 환란중에도 버틸수 있고, 인내할 수 있고, 인내는 우리를 연단시키고, 연단은 소망을 품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