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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들

갈라디아서 1장 18 ~ 24절 설교 코람데오

설교본문 : 갈라디아서 118-24

설교제목 : 하나님 앞에서(코람데오)

로마서의 요약본이라고 불리는 갈라디아서는 마틴 루터가 가장 좋아하는 서신서였습니다. 6장으로 되어진 짧은 편지이지만, 복음에 관해 명확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쓸 때는 늘 똑같은 구조를 담고 있습니다. 전반부에는 인사말과 함께 교리적인 부분을 다루고 후반부에서는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론과 실제로 나누어서 편지를 쓴 것입니다. 로마서도 1~11장이 교리를 다루고 있다면 12장부터 16장까지는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갈라디아서도 1~4장까지는 교리적인 부분, 5~6장은 실천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서신서와는 다르게 갈라디아서에서 만큼은 처음 서두에 감사인사가 빠져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예루살렘 방문(18~19)

18 그 후 삼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사도 바울이 자신의 행적을 사실대로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는 아라비아로 가서 3년 동안 광야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메섹에 돌아왔다가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 입니다. 그런데 처음 예루살렘에 나올 때와 예루살렘에 돌아갈 때 만나는 대상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누구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간다고 나왔습니까? 게바(베드로), 그리고 주의 형제 야고보를 만났다고 이야기 합니다처음 예루살렘에서 출발할 때 그가 만났던 사람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잡기 위한 공문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데 그 만나는 사람이 바뀌어버렸습니다. 믿음생활을 하다 보면 바울과 같은 일을 겪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달라져버립니다. 제가 신학교를 가게 되고 믿음생활을 하다보니까 이제 만나는 사람들이 다 목사님, 전도사님, 권사님, 집사님입니다. 만남의 대상이 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은 믿음의 성도들을 만날 때 힘을 얻고, 그 얻은 힘을 가지고 세상의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여러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그들에게 힘을 얻고,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 교회와 교인들을 생각해서라도 내가 복음을 제대로 전해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성도에게 위로를 받고, 세상에 나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느 한 곳의 만남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그냥 교회 교인들하고만 지내고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반대로 그냥 세상 사람들만 만나는 것도 믿음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둘 사이를 오가며 주의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믿음의 성도들에게는 본이 되고, 자랑이 되고, 나아갈 길을 제시했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오늘 하루도 누군가를 만날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믿음의 간증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20)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코람데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사도 바울은 늘 코람데오의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데 어떻게 거짓말하고 사기치는 인생을 살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CCTV가 바로 앞에 있다면 무슨 죄를 저지르겠습니까? 그런데 CCTV보다 더 무서운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은 인생을 허투루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믿는 사람들이 넘어지느냐?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자꾸 잊어버리고 하나님 없이 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18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오늘 하루를 제대로 살려면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시면 됩니다. 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저주의 형틀인 십자가를 자신의 앞에 두고 살았습니까? 십자가를 볼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명기 64~5절 말씀, 쉐마 이스라엘에 관한 말씀을 하면서 또 너희는 그것을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아라.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서 붙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살았던 사람하면, 다윗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사무엘하 6장에 보면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무엘하 614절 말씀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이 왕의 체통도 잊은 채 힘을 다하여 춤을 춥니다. 자기 옷이 벗겨지는 것도 상관없이 춤을 춥니다. 왜요? 여호와 앞에서 춤을 추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산다는 것은 세상과 환경과 사람과 체면을 뛰어넘어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코람데오의 신앙으로 살 때 우리는 넘어지지 않고,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 없이 살 때 우리는 쉽게 넘어지고, 시험에 듭니다. 쉽게 흔들리는 것이지요. 사람의 말에 현혹되고, 사람의 말에 넘어가고, 사람의 말에 상처 입고, 마음이 요동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시편에서 다윗은 이 코람데오의 신앙을 또 고백합니다.

시편 168절 말씀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우리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셔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소문난 교회, 이미지 시대(21~24)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가 또 주목할 만한 것은 바울을 얼굴로는 알지 못하지만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말씀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고든 올포트, 레오 포스트맨은 다음과 같이 소문의 공식을 제시했습니다.

R(루머) = i(임포턴스) x a(엠비규티) / 소문 = 중요성 X 애매함(모호함)

소문의 강도와 유포량(Rumour)은 문제의 중요성(importance)과 해당 논제에 관한 증거의 애매함(ambiguity)의 곱에 비례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공식은 중요함과 애매함의 합이 아니라 곱셈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 중요함과 애매함 가운데 어느 한쪽이 “0” 이면 소문이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든 올포트 소문은 '소문 내는 사람들의 선입견과 관심 등에 의해 왜곡된 정보'를 뜻합니다.

시부타니 소문이란, 애매한 상황에 연루된 사람들이 각자의 지식을 모아 상황에 대한 유의미한 해석을 내놓는 커뮤니케이션이다.”

우리가 잘 알 듯이 소문은 또 다른 소문을 낳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좋은 소문 보다는 나쁜 소문이 더 급속도로 퍼진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고급 정보에 대해서는 잘 퍼지지 않습니다. 퍼지는 순간 자신의 이익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쁜 정보, 입가심과 가십거리 같은 이야기들은 순식간에 퍼집니다. 요즘은 디지털 정보화 시대입니다. SNS는 물론, 카톡이나, 페이스북, 유튜브 등 다양한 미디어 매체를 통해서 정보가 공유되고 퍼집니다. 이전과는 소문이 나는 것도 폭발적인 속도로 증가한 것입니다. 바울 당시에도 이러한 소문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지금이나 2천년 전이나 동일합니다. 이러한 소문이 때로는 우리 자신을 규정짓기도 하고, 교회를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초기 기독교 교회에 대한 오해 중에 하나는 인육을 먹는다는 오해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성찬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그 사실이 오해를 낳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책으로 읽고, 실제로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이전에 한 명의 새가족이 교회에 왔습니다. 그 분은 중국동포, 조선족출신의 성도님이었습니다. 그 날은 성찬식이 있어서 앞에 성찬식을 차려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자리에 앉아 있다가 예배 중간에 밖으로 바쁘게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권사님 중에 한 분이 가서 왜 가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교회에 왔는데 너무 무섭다는 것이었습니다. 뭐가 무서운가 물었더니 앞에 놓여있는 성찬식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찬상이 꼭 시체를 눕혀놓은 것 같아서 무서워요

정말 그 말을 듣고 성찬상을 봤는데 시체를 눕혀놓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평소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앞에서 본 모습은 영락없이 시체 한구를 천으로 덮어놓은 모양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 교회내에도 수많은 소문과 오해가 난무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교회는 지금도 든든히 세워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교회는 든든히 세워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문은 참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가 소문한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믿음이 좋은 교회, 예수님 닮은 교회, 사랑이 넘치는 교회, 사람이 변화되는 교회. 이러한 소문이 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바울이 가기도 전에 이미 소문이 먼저 가있습니다.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 벌써 소문이 난 것입니다. 소문만 듣고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 지역사회에 좋은 소문나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들이 많아지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진실로 얼굴을 대했을 때 소문 보다 더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러한 사람이 나옵니다. 열왕기상 101절에서 13절 말씀을 보면, 솔로몬을 찾아온 스바의 여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101스바의 여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그를 시험하고자 하여..”

4~ 7절 말씀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모든 지혜와 그 건축한 왕궁과 그 상의 식물과 그의 신하들의 좌석과 그의 시종들이 시립한 것과 그들의 관복과 술 관원들과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는 층계를 보고 크게 감동되어 왕께 말하되 내가 내 나라에서 당신의 행위와 당신의 지혜에 대하여 들은 소문이 사실이로다 내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친히 본즉 내게 말한 것은 절반도 못되니 당신의 지혜와 복이 내가 들은 소문보다 더하도다

할렐루야! “이제 와서 친히 본즉 내게 말한 것은 절반도 못되니 당신의 지혜와 복이 내가 들은 소문보다 더하도다

 우리 교회가 이러한 소문난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 교회가 좋다 좋다 하는 소문을 들었는데 직접 와서 보니 내가 들은 것은 절반도 못되니 우리 교회가 소문 보다 더한 교회입니다. 이러한 칭찬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소문이 나려면, 중요성과 함께 분명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선한 행위입니다. 믿음의 선한 영향력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진실, 믿는 자들의 신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더 친절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좀 더 손해보더라도 남에게 득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 닮은 사람들입니다. 뭔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그 무엇이 있어야 소문이 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거창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말투, 우리의 표정, 우리의 목소리, 우리의 눈빛, 우리의 행동거지, 우리의 걸음걸이, 우리의 삶의 자세 하나 하나에서 그러한 것들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자세를 바로 앉아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한 번 살아보십시오. 하나님의 자녀 답게 담대하십시오.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하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소망으로 고난을 견뎌보십시오. 인내하십시오. 믿음 안에서 오래 참으십시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우리는 지금처럼 살면 안됩니다. 더 큰 열심과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여기 앉아 있는 모든 이들을 통해 나타나서 우리 교회가 소문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스바의 여왕이 고백했던 말을 우리의 귀로 듣는 귀한 은혜를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