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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들

갈라디아서 1장 11~17절 설교

설교본문 : 갈라디아서 111-17

설교제목 :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 사도가 된 경위

갈라디아서가 왜 쓰여졌을까 생각해보면 갈라디아 교회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사도직에 관한 문제입니다.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역사적으로, 실제로 만나지 못했다. 둘째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배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다. 셋째는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는 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 이런 이야기가 갈라디아교회에 퍼졌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힘들게 눈물로 세운 교회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마음이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도성에 대한 변호하는 이야기가 오늘 11절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사도가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1.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된 사도(11~12)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은 누군가에게,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람의 뜻을 따라 그 복음을 전한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그 복음을 받은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대신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계시는 그리스어 원어로 아포칼립시스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감추인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눈을 열어주시고, 가르쳐주신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자기 스스로 학위를 받아서 된 것도 아니고, 공부해서 된 것도 아니고, 신학교수님에게 배워서 된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께 배우고, 듣고, 깨달은 것입니다. 바울은 지식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확실한 다메섹 체험사건이 있기에 능력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얼마나 강력했는지 모릅니다. 이 계시에 사로잡히면 완전히 인간이 달라져버립니다. 완전히 새로워집니다. 건축자의 버린돌이 아주 중요한 모통이돌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 속에도 보면 이러한 계시와 같은 사건이 나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환상에 관한한 여러 인물이 나옵니다. 에스겔의 환상, 다니엘의 환상, 사도 요한의 계시, 이사야의 소명받은 이야기 너무 많은 계시와 환상의 이야기들이 성경에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바울의 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변화산 사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했습니다. 그 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말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또 제자들이 구름 속에서 들리는 음성을 듣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사도 바울의 다메섹 체험 사건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우선 다메섹을 향해 가는 사도 바울에게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춥니다. 바울은 땅에 엎드러져 예수님의 소리를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사도 바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그 사흘 동안에 자신에게 일어난 다메섹 계시 사건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남들에게는 감추어진 것이었지만, 자신에게는 분명히 드러난 계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냥 꿈이 아니었습니다. 밤중에 자다가 본 것이 아니라, 환한 대낮에 일어난 사건이었기에 충격은 더 컸습니다. 너무나 잊을 수 없는 사건이기에 사도행전에만 사도행전 9, 22, 26장에서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임하길 축복합니다.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체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사도는 사람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께 직접 배워야 합니다. 스승도 선생도 한 분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의 겸손을 배웁시다. 예수님의 섬김을 배웁시다. 바울이 어떻게 이런 인생을 살 수 있고, 이러한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답은 자명합니다. 예수님의 계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계시와 바울 당시의 계시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종말론적인 계시에 대한 생각과 이해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는 곧 종말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더 결단할 수 있었고, 현실을 뛰어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서로의 물건을 통용하고, 나누고, 자신의 밭과 재산을 팔아서 공동생활을 하게 됩니다. 초대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 밑바닥에는 이러한 종말론적인 믿음과 계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오늘날의 교회에 있어서 왜 능력이 나타나지 않느냐 했을 때 사실 이러한 종말론적인 믿음이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가 재림 예수라고 말하면서 몇날 몇일 종말이 온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거의 이단으로 보시면 됩니다. 집이며 가족이며 다 버리고 자신을 따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잘못된 신앙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러한 재림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대망이 없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눈 앞에 보여지는 현실밖에 없습니다. 현재에 안주하게 되는 것이고, 축복도 현재에만 해당되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도 모르게 현재의 축복만을 구하는 기복신앙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장차 올 영광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처럼 비참하고 불쌍한 이들도 없다는 말입니다. 확실한 종말신앙을 가지고, 하늘 신앙을 가지고, 매일의 삶 속에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며 산다면,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의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우리도 체험하고 산다면, 우리도 바울처럼 쓰임 받을 수 있을 줄 믿습니다. 그 놀랍고 잊을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가치관과 인격과 성격과 생각이 완전히 달라질 수만 있다면, 우리의 생명까지도 내어놓고 예수님이 원하는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한 인생 되길 바랍니다.

2. 바울의 열심 잘못된 열심히 무섭다 (13~14)

두 번째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과거와 잘못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해치고, 깨뜨렸던 자신의 과거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그 일에 적극적이었고 열심이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열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냥 열심히만 하면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열심히 나쁘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맡은 일에는 최선을 다하는 열심히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심 없는 신앙은 아무 것도 해낼 수 없습니다. 신앙의 성장도 가져오지 않습니다. 뜨뜻 미진근한 것 같은 신앙은 아무짝에 쓸모도 없습니다. 적당히 예수 믿는다고 해서 천국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님도 보면 열심 없는 제자보다 때로는 실수하더라도 열심히 있는 제자를 사랑하십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얼마나 열심히 있고 나서기 좋아합니까? 하지만 그만큼 많은 실수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그 열심히 있는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찾아가 주십니다. 예수님도 열심히 있는 제자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십시오. 주님을 사모하는 일에 열심을 내십시오.

우리가 종종 듣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라는 말입니다. 열심을 내더라도 방향이 잘못되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고, 오히려 더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윤리적인 방향이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의 목표가 중요하다 이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의 열심은 대단했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다메섹까지 대제사장의 공문을 들고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가두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돈을 주겠다고 한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잘못된 열심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열심 안에는 잘못된 점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한 가지는 그 열심을 통해 다른 사람도 다치고, 자신도 다치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가지는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열심히 아닌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한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자기 스스로 이야기 합니다. 14절 말씀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객관적으로 따져보면 동년배에서는 비교할 대상이 없고, 여러 연갑자보다도 훨씬 지나치게 유대교를 믿고, 전통을 따라 살았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율법에 있어서는 최고 수준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 어쩌면 바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는 다메섹 체험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자기 안에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외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일어나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개입해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습니다. 이제까지는 자기의 의를 위해 살고, 율법에 대해서 잘한다 칭찬받고, 대제사장에게까지도 인정받는 사람이었지만, 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사건이 완전히 삶의 목적과 방향을 바꿔 버렸습니다.

15~16절 말씀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자신을 택하시고 정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기 자신 스스로 알게 된 것입니까?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때문입니다. 그 계시를 경험한 이후의 바울의 반응에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아마 그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과 말과 모습을 떠올리고 자신의 지난 날의 삶을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지난 날 잘못된 열심으로 살았음을 인정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13절에 보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우리는 이 말씀 가운데 우리의 방향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시 잘못된 열심을 가지고 신앙생활하고 있지는 않는지, 혹시 잘못된 열심을 가지고 남을 정죄하고 비방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니면 아예 신앙생활에 열심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한 번 뿐인 인생, 무엇을 위해 그렇게 살고 있나 생각할 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붙들린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가장 존귀한 인생이요, 가장 영화로운 인생이라는 것을 이 다메섹 계시 사건을 통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방향을 수정해서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가지고 살면 됩니다. 자기의 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나 신앙생활 잘하고 봉사 잘한다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사람들의 기쁨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 우리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삶을 사는 것,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 예수 방향으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내게 주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입니다. 누구 시선 의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가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사모하며 가는 것입니다. 그 열심은 아무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죽음도 막지 못합니다. 바울 한 사람의 열심이 유럽을 삼켰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붙들려 사는 단 한사람만 있다면 우리가 사는 지역이 변화될 줄 믿습니다.

3.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15)

세번째로 바울은 분명히 먼저 자기 자신의 잘못된 열심을 인정하고 나서 1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사도 바울은 어머님 뱃속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이 자신을 선택하시고, 은혜로 예정하셨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중간에 딴 길로 새고, 탕자처럼 살기도 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큰 죄를 저지르긴 했지만, 그 이전부터 자신을 부르신 그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성 어거스틴도 그랬습니다. 젊은 날 마니교에 빠져 살고, 동거하면서 지내고, 타락할 때로 타락했지만,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 때문에 다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기독론, 삼위일체론 등 기독교 교리를 정립하며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중세 이후의 모든 신학과 루터, 칼빈 종교개혁자들의 모든 신학이 거의 어거스틴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도 자녀들을 키우다 보면 유난히 속썩이는 자녀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아들들이 그렇습니다. 부모님 속을 새까맣게 태웁니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사고치고 오고, 누구 때리고 오고, 학교 안나가고, 가출하고, 경찰서에서 연락오죠. 그런데요. 그런 자녀들이라고 포기하는 부모님이 계신가요? 아니 인간적인 부모님은 포기할 지도 모르지만, 우리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은혜로 다시 불러주십니다. 아버지의 은혜를 깨우칠 때까지 기다려주시는 거에요. 하나님이 은혜로 불러주시면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요, 죄인 중에 괴수와 같았던 바울도 위대한 사도가 되어 버립니다. 타락했던 어거스틴도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해주십니다. 꼭 버려진 돌 같고, 쓸모없는 것 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택하시면 이처럼 귀하게 사용하신 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도 책임져 주십니다. 믿으십니까? 지금은 좀 반항하고, 밖으로 돌지 모르지만, 부모님의 사랑이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깨달을 때가 반드시 옵니다. 지금은 우리 말 안들어요. 우리 힘으로 어떻게 안되요. 말도 안통하고, 목소리만 커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눈 앞에 보이는 현실과 상황만을 보고 좌절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을 가지고 멀리 내다보고 큰 그림을 그릴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 듣는 가운데 우리를 은혜로 부르신 이가 계심을 기억하면서 믿음 안에서 온 가족이 하나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식탓 부모탓 하기 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입니다. 고백하고 예수로 사는 귀한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