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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들

갈라디아서 1장 6~10절 강해설교

말씀본문 : 갈라디아서 16-10

설교제목 : 다른 복음은 없나니

요즘은 자기계발 서적이 참 많이 나오는 시대입니다. 책 제목 중에 참 눈길을 끄는 책이 있었는데 그 책제목은 결국 성공하는 사람들의 사소한 차이 였습니다.

일본 최고의 경영전문가가 알려주는 49가지의 사소한 차이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24시간이란 똑같은 시간을 갖고, 또 똑같은 업무환경과 세상에서 사는데 어떤 사람은 왜 이렇게 잘하는데 어떤 사람은 왜 이렇게 뒤처지는지? 그 답은 사소한 차이에 있다고 알려주고 있는 책입니다. 어떤 일을 맡든 좋은 성과를 일궈내는 사람들을 보면 일을 대하는 마음가짐부터 업무를 처리하는 작은 행동 원칙, 더 나아가 일상생활에서 시간과 돈을 활용하는 능력까지 남다르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사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예배를 드리고, 똑같은 찬양을 부르고, 똑같은 말씀을 듣는데 왜 어떤 사람들은 눈물흘리면서 은혜받고 감동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인지 모릅니다. 예배 드리기 전과 후가 달라야 하는데 예배를 드릴 때나 안드릴 때나 똑같습니다. 예배 때 은혜받는 사람들은 사소한 차이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가짐의 차이일 수도 있고, 말씀을 받을 때의 태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구나 하고, 꿀송이처럼 말씀을 받아 먹습니다. 오늘 예배 가운데서 남들과 다른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들으시고, 은혜 충만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다른 복음과 참된 복음

오늘 우리가 읽은 갈라디아서 16~ 10절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도 자신이 전한 복음의 메시지 외에 다른 복음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1~5절은 인사말과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6절부터 시작됩니다. 6절에서부터 10절까지를 읽어보면, 계속해서 반복되어져 나오는 단어가 바로 다른 복음이란 말입니다. 다른 복음 좇는 것을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 말씀을 보면,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격앙되었는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고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다른 것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키울 때 사소한 장난은 눈감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 아이의 목숨이 달려 있는 것에는 얼마나 강하게 이야기를 합니까? 아이의 목숨이 달렸기에 너 높은 곳에 올라가면 안돼? 자동차 탈 때는 안전벨트를 꼭 매어야 돼? 너 그거 하면 안돼~ 강하게 이야기합니다. 아이를 사랑하기에 더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은 복음에 관해서 만큼은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의 문화, 음식 면에서는 얼마든지 양보했습니다. 물론 덕이 되지 않는 것은 하지 않는게 좋다~ 뭐 이정도 였습니다. 하지만 복음에 관해서 만큼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강하게 이야기합니다. 왜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에 대해서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요? 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강하게 경고하는 것일까요? 복음이 그 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소중한 복음을 세상의 가치대로 바꾸어버리고 제 마음대로, 제 믿고 싶은대로 사람들이 변질시키려고 하는 것을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바울의 격앙된 외침 속에서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고 있지는 않는지? 그냥 내 믿고 싶은대로 세상과 타협하며 신앙생활하고 있지는 않는지? 한번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보다도 세상의 물질주의, 성공주의가 나에게 더 영향을 미치고 있지는 않냐 그 말입니다. 말씀이 있는 자리보다도 돈과 명예가 있는 곳을 탐하고 있지 않냐 하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보다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곳에 더 발걸음을 향하고 있지 않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읽는 성경을 보십시오. 보면 매번 우리가 은혜 받은 구절에 듣기 좋은 구절에 색깔펜으로 밑줄 긋고, 표시를 해놓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도 목사님이 자기가 듣기 좋고 자기 마음에 드는 말씀을 하시면 큰 소리로 아멘 하다가도 좀 듣기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말씀에는 아멘 하지 않잖아요. 우리가 듣기 좋은 말씀만 듣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축복의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말씀과 저주의 말씀도 있습니다. 설교도 보면, 심판에 관해서 얘기하지 않고 축복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냥 설교자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게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한 다른 복음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갈라디아서 전체를 놓고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이 다른 복음과 참된 복음이 계속해서 맞부딪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복음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복음이지만, 참된 복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복음입니다. 다른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고 배운 지식이지만, 참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받은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율법주의와 육체적인 할례를 강조하지만, 참된 복음은 오직 믿음과 성령을 좇아야 된다고 강조합니다. 다른 복음은 육체의 종노릇하는 것이지만, 참된 복음은 그리스도의 자유자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복음이 말하는 육체의 일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 같은 것이지만, 참된 복음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다른 복음은 할례를 통해 육체로 자랑하려 하지만, 참된 복음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제까지 다른 복음과 참된 복음에 대해 비교해가며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참된 복음을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육체의 일로 자랑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실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 입장에서는 다른 복음에 혹 할만 합니다. 신학자들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이미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이면서도 예수님을 믿는 자들, 바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과 같은 사도를 따르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같은 역사적으로, 실제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배웠던 사도들 밑에서 신앙생활했던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에게는 남다른 자부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믿는 유대인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곁에서 보면서 신앙생활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큰 자랑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와서 하는 이야기가 당신들도 예수님을 믿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을 믿어야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지금에야 율법을 구약이라고 이야기하지 그 때 당시에 성경은 율법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이 말하고 있는 메시야가 그리스도임을 주장하고 설명하는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복음, 이 복음을 제대로 믿으려면 율법대로 할례를 받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제대로 예수 믿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할례를 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마치 할례를 받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처럼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나 할례 받으면 사람들에게 믿음이 있는 것처럼 인정받는 것이죠. 지금 시대로 말하면 할례가 아니라 세례라고 말할 수도 있고, 직분을 받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세례를 받기만 하면 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찬식에도 참여하고, 주님과 하나되는 신비의 연합을 맛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직분을 받으면 얼마나 처음에 영광스럽고 좀 믿음이 커진 것 같고, 기분이 좋지 않습니까?!

물론 틀린 말이 아닙니다만, 다른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가끔 전도 할 때를 생각해봅시다. 사람들에게 교회 한번 나와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배 한번만 참석해보라고 이야기합니다. 마치 교회 한 번 나오면 구원받는 것처럼, 예배드리고 말씀 한 번 들으면 구원받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제가 예전에 학교 앞 전도를 나가는데 막대사탕을 들고 초등학교 후문에서 전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집사님 한분이 와서 이야기 하는데 자신의 딸이 초등학교 5학년인데 전도하는 것을 보고 와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엄마, 사탕 하나 주면서 교회 오라고 하는 게 맞는 거야?” 그 전도하는 모습이 그렇게 좋아보이지 않았다면서 한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런 것을 사탕 하나로 맞바꿀 수가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성공이란 사탕, 건강이란 사탕, 명예라는 사탕을 가지고 어떻게 그 엄청난 구원과 복음을 바꿀 수 있습니까? 우리는 사실 예수 믿는 쉬운 방법을 택하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방법, 광고하고, 프로그램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것들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믿으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예수믿으면 건강해지고, 예수믿으면 문제가 다 해결되는 만병통치약처럼 복음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믿는 것은 방법론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참된 복음, 그것을 믿고 묵묵히 기도하고 구제하고 선교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을 가지고 승부하면 안됩니다. 영적인 것을 가지고 승부해야 합니다.

참된 복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복음, 오직 믿음과 성령을 좇아사는 복음, 육체에 종노릇하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자유자로 사는 복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복음,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도 바울의 그 복음의 외침이 오늘 우리에게 들려지길 소망합니다.

2.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믿음(10)

오늘 말씀에서 특별히 주목해야할 말씀은 10절 말씀입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바울은 삶의 기준이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기준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할 일이라면 뭐든지 했습니다. 이런 사람을 성경에서 찾으면 누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합한 자, 다윗왕을 생각해보십시오. 왕의 체통이나 위엄,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생각하기 보다 하나님을 기뻐하며 춤추는 다윗을 생각해보십시오. 옷이 벗겨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춤을 춥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성공입니까? 돈입니까? 지위입니까?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 여러분의 삶의 기준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한 삶을 사신 분이 한 분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기에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 십자가에 달리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기에 저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고 낮고 낮은 이땅에 오셔서 섬김의 왕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기에 엎드려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기에 자신을 어린양처럼 제물로 내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기에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기에 하나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기에 하셨습니다. 한 번 뿐인 인생 여러분은 누가 기뻐하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이 기뻐하는 귀한 인생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셨기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신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자신은 그리스도의 노예, 예수의 노예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물건이라고 고백한 것과 다름 없습니다. 그 때 당시에 노예는 말하는 물건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냥 재산에 불과했습니다. 죽든지 다치든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예수님의 노예 라고 당당히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슴 중심에 누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지 들여다보십시오. 우리의 주인된 자리에 우리 예수님이 앉아계십니까? 혹시 내가 주인 노릇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울처럼 우리도 당당히 삶 속에서 나는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종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학창 시절에 혼자 기타치면서 참 많이 불렀던 찬양 중에 이런 찬양이 있었습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 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 놓고 주님만 사랑해 주 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 위에 서리

이러한 찬양을 날마다 부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