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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들

갈라디아서 1장 2절 설교

설교제목 : 갈라디아 여러 교회 들에게

설교본문 : 갈라디아서 11-5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전주 안디옥교회 원로목사님이신 이동휘 목사님이 좋은 설교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기사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성경의 중심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무엇보다도 예수를 설교의 핵심으로 삼아야 합니다. 설교를 듣고 나가는 교인들의 입술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니 예수님은 과연 위대한 분이시군요. 그분은 저의 구세주가 되십니다란 고백이 튀어 나와야 합니다. 이런 설교가 참 설교입니다

왜 목사님은 매 주일 설교 때 복음서만 가지고 설교하십니까? 하고 묻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야 되는데 혹시 오늘 처음 나온 새신자가 예수님을 모르고,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복음을 한번도 듣지 못할까봐 예수님에 관한 복음 설교를 한다고 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목회자란 어떤 목회자일까요? 다니엘 헤니처럼 얼굴 잘생기고, 설교 잘하고, 기도 은혜스럽게 하는 목회자가 좋은 목회자일까요? 좋은 목회자란 자기는 십자가 뒤에 감추고 성도들이 예수님을 보게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목회자가 좋은 목회자입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성도란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성도가 좋은 성도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느냐에 우리의 생명이 달려 있습니다.

1. 여러 교회들에게, 여러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끼치자

오늘 말씀을 보면, 또 하나의 갈라디아서의 특징을 한 가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12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사도 바울은 먼저는 안디옥교회에 있는 모든 형제들을 대표해서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대표성을 뛴다는 것은 대단히 영예로운 것입니다만 한편으로는 엄청난 부담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말 한마디가 온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안디옥 교회를 대표해서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이러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낸 것, 이것이 갈라디아서의 또 하나의 특징입니다.

 다른 서신서, 빌립보, 에베소, 골로새, 고린도전후서, 로마서는 어느 한 도시에 보낸 편지인데 갈라디아서만 갈라디아의  여러 지역 교회들에게 편지한 내용입니다. 예를 들면, 부산교회, 대구교회, 광주교회가 아니라 전라도 교회, 경상도 교회 뭐 이런 식으로 큰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1차 선교여행 중에 돌에 맞아 죽을 뻔했는데도 다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돌아다니며 재차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사실 더베에서 육로로 수리아 안디옥까지는 돌아가는 것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하지만 빠른 길보다 그는 힘들지만 다시 갈라디아 교회를 세우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그렇게 힘들게 세운 비시디아 안디옥 교회, 루스드라 교회, 이고니온 교회, 더베 교회에 편지를 쓴 것입니다.

치명적인 독은 작은 양만 있어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지역 여러 교회에 다른 복음이라는 치명적인 독이 퍼지자 교회들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흔들리기 시작하고, 사도 바울이 두 번이나 방문하며 세웠던 교회가 무너질 위기 가운데 놓였습니다. 암세포가 순식간에 온 교회에 퍼진 것입니다. 바이러스가 컴퓨터를 망가뜨리듯이 온 교회에 퍼지게 된 것입니다. 잘못된 소문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고 교회가 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온누리 교회 이재훈 목사님이 쓴 <생각을 생각한다>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소문의 위력은 실로 대단해서 많은 사람에게 전해질수록 버전이 다양해진다. 소문을 나누고 전파하며 묵상하는 사회나 교회는 소문에 의해 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지도자들은 소문과 진리를 분별해 소문이 진리처럼 변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서 교회 내에서 했던 것이 소문실명제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전해들은 소식을 전할 때 누구에게서 들었다는 말을 함께 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진정한 삶의 변화는 소문에 귀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귀 기울일 때 일어납니다. 이것은 어느 한 교회만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닙니다. 갈라디아 전 지역에 있는 교회, 이를테면 서울 전체에 있는 교회를 두고 한 말입니다. 이 말을 다시 생각해보면, 참된 복음은 모든 교회에 기쁜 소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교회에 복음이 증거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만 듣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교회는 이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시 복음을 갈라디아 여러 교회에 증거합니다. 다른 복음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구속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우리는 다시 들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구원에 관해서 부활의 영광과 소망에 관해서 다시 들어야 합니다. 이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우리는 다시 복음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 옆에 여러 교회도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이 서신을 썼습니다. 어느 한 교회만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옆에 교회도 들을 수 있도록 하라고 썼습니다. 그렇게 쓴 서신서를 2천년 가까이 지난 우리가 또 읽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교회가 이 갈라디아서를 읽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바울이 쓴 편지 하나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갈라디아서에 나온 주옥 같은 말씀들을 들어보십시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11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20)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311)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46-7)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522-23)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67)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614)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과연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살았나?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살았나? 내가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고 세상의 것을 자랑하며 살지는 않았는가?나는 과연 삶 속에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단 하나라도 열매 맺는 것이 있는가? 나는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히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가?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돌에 맞기도 하고,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서는 산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을 당하고 여러 번 죽다가 살아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쉽고 배불리 사역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복음을 들고 여러차례 방문했습니다. 방문한 횟수로만 따지면 4번이나 방문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빼고 나머지 지역은 많아야 2~3번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지역은 4번이나 방문했습니다. 왜 이렇게 자주 방문했을까요? 바울의 첫 전도여행지가 바로 갈라디아였는데 그 때 너무나도 고생고생하고, 또 그 곳에서 교회가 세워지는 기쁨도 경험하고, 유대 율법주의자들 때문에 많은 위기를 경험한 곳이 바로 갈라디아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수술을 하더라도 정말 아프고 힘들고 어려운 부위는 여러 번에 걸쳐서 수술하는 것과 도 같습니다. 갈라디아 지역이 그런 곳이었습니다. 미운정 고운정 다 든 교회가 바로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사도 바울이 그만큼 여러 교회에 영향력 있는 사도 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가 세계가 나의 교구다라고 말한 것처럼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 전체 여러 교회들을 놓고 기도하고 복음 전하고, 편지를 쓴 것입니다. 우리도 이처럼 영향력 있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너무 작게만 기도하지 마시고, 큰 뜻을 품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 복음의 내용 :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두 번째는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편지의 내용,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14~5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건져주시기 위해 자기 몸을 십자가에 드리셨고,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 누구도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대속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요. 예전에 이 말씀을 어떻게 초등학생들에게 전해야할까 고민하다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얘들아, 너희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데 갑자기 큰 트럭이 와서 너희들을 덮치려고 하는데 어떤 한 사람이 너희를 도로 밖으로 밀쳐내고, 대신 사고를 당하게 되었단다. 안타깝게도 그 분은 그 사고로 죽음을 당하게 되었지. 만약에 너희들이 죽을 뻔 했는데 대신 죽으신 그 분을 생각할 때 어떤 마음이 들어?“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떠들던 아이들이 조용해지고 손을 들고 대답합니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고마운 마음이 들어요.“

그래~ 바로 그 분이 예수님이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단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을 위해서 말이야. 이제 그런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대신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그 분의 뜻을 이루며 살자! 그게 그분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야.

우리 예수님은 늘 부족하고 허물 많고, 죄 많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피흘려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전에 지나치듯이 본 한 포스터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따라서 예수그리스도, 그런데 예수그리스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

맞습니다. 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답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분에게 있습니다.

90년대 부흥회에서 참 많이 불렀던 찬송가인데요.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그 시절 뜨겁게 부르던 찬송, 목놓아 부르던 찬송, 정말 주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며 부르던 때가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 교회가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이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한 것은 괜히 보낸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 먼저 이 복음을 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전혀 안믿는 초신자가 아니라 믿는다고 하는 교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한 것은 정말 죽어가는 사람이 이 교회 안에 있고, 진짜 주님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며 통곡해야할 사람이 이 교회 안에 있고, 갈급한 심령, 무너진 심령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이 교회 안에 있고, 매일 매일 복음을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이 교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저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복음을 듣기 원하십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앞에 새롭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런 십자가의 복음 앞에 다시금 회복되어진 그 한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다시 철저히 복음의 능력과 위로를 경험하길 원합니다.

복음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도려내고, 완전히 새롭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왜 복음을 듣고도 반응이 없습니까?! 왜 복음 앞에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까?! 왜 복음을 듣고도 전혀 변화가 없습니까?! 왜 복음을 듣고도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잃어버렸습니까?!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자신의 몸을 내어주셨는데 그 주님께 나아오지 않으십니까?! 십자가 앞에 눈물 뿌리며 회개하고 감사하는 귀한 신앙고백이 있기를 원합니다. ~ 주여! 이 불쌍한 죄인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다시 복음을 듣고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결단하는 놀라운 은혜가 지금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형식적이지만 간구하는 인사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받는 은혜와 평강은 얼마 가지 않습니다. 잠시 잠깐은 좋은 것 같지만, 이내 허탈하고 영원하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 받은 은혜와 평강은 얼마나 넓고 깊고 높은지 모릅니다. 그 주님의 은혜를 한번 경험하고 나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 우리 주님의 은혜구나 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가 늘 찬송하는 것입니다.

찬송가 79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영혼이 찬양하네

이 찬송을 우리가 즐겨 부르는데 한 개척교회 목사님이 생활고에 시달리고, 신문배달하면서 목회를 하시다가 급기야 사기까지 당해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악기를 배워서 이 찬양을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이 찬송을 부르는 거에요.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영혼이 찬양하네

 우리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님을 찬송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고난과 역경의 터널을 지날 때에 우리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반드시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여러교회들에게 한참 부흥하고 교회가 성장하고 믿음이 든든히 세워질 때 이렇게 인사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문제가 생겨나고 어려움이 찾아오고, 시험이 들었을 때 그 때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복했습니다.

혹시 갈라디아교회들처럼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놓인 분이 있다면, 오늘 바울이 간구한 것처럼 바울이 축복한 것처럼 여러분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길 좋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