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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들

갈라디아서 1장 1~5절 강해설교

설교제목 :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할렐루야! 오늘 주의 전에 나온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길 바랍니.

우리가 일상 가운데 하는 중요한 일들을 보면, 늘 반복하기 마련입니다. 밥 먹는 것도 그렇고, 잠자는 것도 그렇습니다. 일하는 것도 매일 매일 반복해서 하고 있습니다. 말씀에서도 보면, 자주 반복해서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출애굽 사건을 말한다면, 신약에서는 십자가 사건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자주 반복되어져 나오는 말들이 있습니다.
1절에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3절에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4절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이 5절 안에 세 번이나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고 축복하고 있고,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기 몸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는 신앙을 갖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 아버지 대신 하나님이 하셨다는 고백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는 신앙고백은 우리를 얼마나 겸손하게 만드는 지 모릅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된 것도, 은혜와 평강의 축복을 받은 것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우리를 위해 달리신 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나온 것도 우리가 두 발로 걸어서 나온 것 같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우리의 인생도 모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귀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전셋집 사는 우리의 집주인도 아니고, 우리의 사장님도 아니고, 우리의 아버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특권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 만물의 주인되시고, 창조주 되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니 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인지 모릅니다.

예수님도 이러한 특권을 사용하시는 모습이 복음서에 나옵니다. 예루살렘 입성할 때 그냥 아무도 모르는 마을에 들어가서 매어져 있는 나귀 새끼를 풀어오라고 합니다. 그 마을 사람이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이 얼마나 당당한 태도입니까?! 나귀 새끼 주인도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주님이 쓰신다고 하면 뭐든지 오케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당당하고 담대한 신앙을 우리도 갖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믿음의 기준을 높이자

사도 바울은 오늘 갈라디아교인들에게 자신이 누구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는지를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사도가 된 것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고, 사람들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은 열두 제자 중에 한명 가룟 유다가 자살하자, 1명을 더 제비뽑기로 뽑게 됩니다. 그래서 맛디아가 뽑히게 된 것이죠. 제비뽑기를 하기는 했지만, 사람들에 의해서 뽑히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맛디아처럼 사람들로 말미암아 뽑히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대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을 사도로 뽑아 준 분은 사람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가 간 곳이 있습니다. 그 곳은 아라비아 였습니다. 3년 정도를 그 곳에 머물렀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옵니다.

갈라디아서 116~17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사도 바울은 혈육과 의논하지 않고, 사도들이 있던 예루살렘으로 가지도 않았습니다.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 이중표 목사님이 설교 중에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신학교 시절에 열심히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물으셨답니다. 너는 지금 무엇을 공부하고 있느냐?’ ‘, 신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신학은 무엇이냐?’ ‘,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학문입니다.’ ‘그렇다면 신학을 너는 누구에게 배우느냐?’ ‘, 신학교 교수님들에게 배우고 있습니다.’ ‘아니,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왜 교수들에게 배우느냐? 나한테 배워야지~ 이제부터 나에게 와서 배워라’ ‘~ 맞습니다. 하나님께 배우겠습니다그래서 이중표 목사님이 하나님한테 신학을 배우느라고 신학교 성적이 안좋았다고 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게 배우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고 배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순절 기간에 성경묵상하기와 깨어 기도하기에 열심을 내라는 것입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하나님께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그 말씀과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우해 피흘리시고 우리를 안아주시는 그 사랑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즘 세대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누구나 자신의 믿음을 입으로 고백한다는 사실입니다. 옛날에는 어느 정도 핍박이 있고, 시련이 있어서 믿음이 있고 없고가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시대는 거름종이 같은 게 없다보니까 다들 교회 와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만 드리면 누구나 신앙이 있고, 거룩해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믿고, 동정녀 탄생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모두가 다 믿는다고 하고, 아멘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삶은 전혀 그리스도인 같지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는데 삶으로는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리에 보면 중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 중생은 예수님 만나서 새롭게 거듭났다는 말입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교회 안의 몇 퍼센트가 중생 받지 못했다고 이야기한지 아십니까? (95%) 이게 얼마나 큰 문제 인지 모릅니다. 사실 요즘 교회를 보면, 너무나 신앙의 기준이 낮아져 버렸습니다. 세례 받는 것도, 집사직분 받는 것도, 너무나 신앙의 기준을 낮춰버렸습니다. 수적으로는 부흥했을지 모르지만, 그러다보니 교인들 신앙의 질은 점점 떨어지게 되는 것이고, 교회 내에서 문제가 생겨나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문제의 책임은 사실 저희 교역자들에게 있습니다. 리더들에게 있습니다. 직분자들에게 있습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 의해서 인정받고 싶다 보니 자꾸 원칙에서 벗어나 기준을 낮추고 쉽게 쉽게를 외치다 보니 교회에 위기가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천국가면 목회자들은 가장 구석에 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세속화되고,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다보니 교회가 마치 기업이요, 회사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제는 말로 믿음을 고백하는데서 넘어서서 삶으로 살아내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말씀 암송하면서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는 말씀 한 절 한 절에 깊이 있게 빠져들고 말씀대로 살려는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누가 그런 사람이 되라고 말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부터, 여기 머리 숙인 우리부터가 그런 사람이 되면 됩니다. 다른 사람 볼 것 없습니다. 나부터가 하나님으로 살고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기준을 높게 잡아야 합니다. 사람 때문에 인기 때문에 체면 때문에 예수님이 세우신 기준을 낮추면 안됩니다. 세상과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신앙생활이 편해지면 편해질수록 우리의 믿음을 잃기가 쉬워지기 마련입니다. 자꾸만 물러서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모시던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교역자가 성도들에게 한 발 양보하면, 성도들은 열 발자국 물러선다. 믿음의 리더들이 성도들을 훈련시키는데 한 발 물러서면 열 발자국 퇴보한다는 말입니다.

윌리엄 보든 선교사 의 남김없이, 후퇴없이, 후회없이” 책에 보면, 그는 억만장자의 상속도 포기하고, 예일대의 학위도 뒤로 하고.. 오직 예수님의 제자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너 자신에게는 No 라고 말하고 예수님께는 Yes라고 말하라. 이것이 힘든가? 힘들게 올라가는 가파른 길인가? 그러나 이 길을 가는 모든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바로 곁에서 동행해주신다. 주님께 제 마음의 보좌를 드립니다. 주님의 뜻대로 저를 변화시키고 깨끗게 하고 사용하소서. 성령의 능력을 온전히 받아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기준은 딱 하나입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은 십자가에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는 플러스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철저한 자기 부인과 죽음을 이야기 합니다.

마태복음 1624 ~ 25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예수님이 세우신 십자가의 기준을 가지고 이 고난주간을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

사도 바울은 누구 때문에 사도가 되었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능력이나 자신의 지식으로 된 것이 아니고, 사람들에 의해 추대받은 것도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우리가 성도가 된 것은 우리가 거룩하거나 자격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성도로 불러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것!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나의 건강, 나의 생명, 나의 직분, 나의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도 제가 목사가 될지는 몰랐습니다. 처음에는 막연히 찬양이 좋아서 신학교에 갔습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 듣는 것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찬양이 다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대하다 보니까 어느새 저도 모르게 목사의 자리까지 서게 된 것입니다. 공부도 잘 못하고, 자질도 부족하고, 집안이 기독교 집안도 아닌데 하나님은 저를 목사로 불러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작동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없이는 못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인생을 뒤돌아보십시오. 모든 것이 다 은혜 아닙니까?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문을 열어주시고, 은혜로 채워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알 때에야 은혜로 인생을 살 수 있고, 은혜로 남을 대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에야 만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시간 우리의 입술로 고백합시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제가 여기 서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립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음을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