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들

예수의 말씀과 베드로의 통곡(마태복음 26장)

예수의 말씀과 베드로의 통곡

마태복음 2669~ 75

 

이번 주간이 고난주간입니다. 마태복음에 나온 십자가 사건과 이야기를 가지고 한 주간동안 주님의 사랑을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은 그 유명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맹세하고 부인하는 장면입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베드로의 부인하는 정도가 시간과 장소에 따라 점점 심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바깥뜰 - 모든 사람 앞에서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부인함.

2) 앞문까지 나갔을 때 -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맹세하고 또 부인함.

3) 조금 후에는 -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저주하며 맹세함.

베드로는 시간이 갈수록 더 예수를 저주하며 부인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내용과 태도에서 차이가 나타납니다. 처음 바깥뜰에서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하고, 앞문까지 나갔을 때는 내가 그 사람을 모른다고 맹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금 후에는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저주하면서까지 맹세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베드로의 부인이 있기 전에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의 체포된 이후에 베드로의 행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베드로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까지 예수를 쫓아 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잡혀서 죽을 수도 있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대제사장 집까지 쫓아왔습니다.

왜 쫓아왔는지는 마태복음 2657~58절에 나옵니다.

예수의 결국을 보려고...” 베드로는 예수님에 관한 믿음을 져버리지 않았다..

그 결국이 궁금했다. 끝까지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다 도망쳐도 베드로는 예수가 심문받는 그 곳까지 뒤따라 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들을 다 물리치고, 기적을 베풀 수 있을 것이라 믿었는 지도 모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자기 눈 앞에 닥친 위기와 현실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하고 맙니다.

베드로가 겁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죽음의 위기 앞에서는 베드로처럼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건강상의 어려움 앞에서 우리는 신앙을 져버리기가 너무 쉽습니다.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죠.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그렇게 믿음과 신앙을 져버리고 현실과 타협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남편 때문에, 자식 때문에, 일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수많은 핑계와 변명을 대면서도.. 우리가 하고 싶은 것들은 어떻게 해서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의 부인을 보면서, 누구나 베드로처럼 신앙과 믿음을 져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예수의 말씀과 베드로의 통곡입니다. 본문 75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는 닭울음 소리와 함께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최후의 만찬 이후에 베드로에게 했던 말씀 : 2634절 말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을 들은 이후에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그 말씀대로 예수님을 부인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닭울음 소리와 함께 예수의 말씀이 떠오른 베드로는 통곡할 수 밖에 없었다. 베드로의 통곡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깨달았음을 보여주는 영혼의 표현이었다. 그냥 운 것이 아니라, 심히 통곡했다고 나온다. 비통하게 울었다.

예수님을 부인했던 죄의식이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이고, 자신의 믿음없음 때문에 통곡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임을 깨닫자, 자신의 연약한 믿음에도 예수님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해주었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통곡할 수 밖에 없었다.

예수의 말씀은 우리를 통곡하게 만듭니다. 인간이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인가?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깨달을 때 입니다.

남편에게, 자식에게, 부모에게 사랑받을 때 인간은 행복합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상대적이기에 잠시 잠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받는 사랑을 깨달았을 때 그 행복은 절대적이요 영원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 사랑을 깨달았을 때 베드로는 통곡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그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 로마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처형됩니다.

자신의 목숨이 아까워 예수를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가, 어떻게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닭울음 소리를 통해 들었던 예수의 말씀, 예수의 사랑에 심히 통곡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통곡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에 빠져 교회에서는 주여~ 주여~ 하면서 세상에서는 주님을 모른채 나만의 이익만을 위해 살아왔던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통곡해야 합니다. 그냥 조용히 우는 것이 아니라, 심히 통곡해야 합니다. 예수의 말씀에 심히 통곡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주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인간적으로 봤을 때도 베드로의 통곡이 있다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요. 나 자신을 위해 통곡하며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냥 예의상 우는 것이 아니라, 심히 통곡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언젠가 우리의 죽음 앞에서 베드로처럼 통곡해 줄 수 있는 사랑의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왜 베드로는 심히 통곡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가슴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짧은 설교가 닭울음 소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베드로가 닭울음소리를 듣고 예수의 말씀을 떠올렸듯이, 오늘 설교를 통해 예수의 사랑을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고난주간 기간에 다시금 우리 자아와 세상적인 욕심이 깨어지고, 심히 통곡하며 주님의 제자된 삶을 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하는 딸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나는 너를 위해 십자가를 지는데 너는 무얼 하고 있느냐? 우리에게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이 아침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