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소명책 챕터 13에서 15장까지 입니다.
분량에 따라서 나눠서 진행하고 약 11주 과정으로 책을 요약했습니다. 물론 오리엔테이션 1주를 포함하면 12주 과정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1주는 야외로 나아가서 나들이를 가거나 소풍을 가거나 국내성지순례를 가는 것도 좋은 프로그램이 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역을 참배하는 것도 참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소명을 따라 이 땅에 온 선교사들의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을니까요.
좀 더 생각하고, 준비하셔서 유익한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소명’(5) 13-15장
13. 그 도(道를) 따르는 자들
- 아더 번즈의 기도 : “주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 소명이 그리스도인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이미 도달한 자가 아니라 이 생애 동안 항상 ‘그리스도의 추종자’요, ‘그 도’를 따르는 자로서 길 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 반박할 수 없는 한 가지 걸림돌
- 반복을 하다 보면 비범한 것도 평범하게, 혁명적인 것도 일상적으로 변해 버린다.
- 당신이 전하는 것을 몸소 실천하라. 그리하면 당신의 신앙을 권하는 셈이 될 것이다. 실천하지 않으면 자가당착에 빠지게 될 것이다.
- <그리스도 - 그리스도인 - 기독교> : 인격적인 것으로부터 비인격적인 것으로.. 직접적인 것으로부터 제도적이고 이데올로기적으로..
* 인생은 여정이다
- 이러한 반박할 수 없는 걸림돌로부터 소명의 진리는 우리를 어떻게 보호해 주는가?
첫째, 소명이 우리가 실제로 그리스도를 따를 때에만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둘째, 소명은 ‘그 도를 따르는 자’가 된다는 것은 인생을 하나의 여정으로 보는 것임을 상기시켜 준다. 셋째, 소명은 우리에게 사람들이 모두 각기 다른 단계에 위치해 있음을 상기시켜주는 한편,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있음을 알려준다. 이것을 망각하고 모든 사람이 우리와 같은 단계에 있어야 하고, 우리와 같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고집하면 바리새인처럼 된다.
-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받는가, 아니면 믿음에 관한 바른 신학적 교리를 신뢰함으로써 구원받는가? 정통적인 교리를 붙들고 있기만 하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여겨지는가? 예수님은?
- 오스왈드 챔버스 : “하나님이 나를 변화시키신 것이 너무나 놀라워서 나는 그 어떤 사람도 단념할 수 없다”
-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부른 제자들을 확인하고 집으로 영접하시기 전까지는, 우리는 가망이 없어 보일 정도로 초라한 미완성의 존재일 뿐이다. 우리는 길 위에 있고, 그 도를 따르는 자들이다.
14. 고상한 마음이 짓는 탁월한 죄악
* 죽음에 이르는 7가지 대죄(교만, 시기(질투),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 IVP
- 버나드 맨드빌 : 자만심과 허영심은 모든 미덕이 힘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병원을 세웠다.
- 소명의 이면에는 자만심의 유혹이 있다.
- 소명심과 자만심은 서로 가깝다는 사실 : 나는 선택받았어. 나는 재능 있는 인물이야. 나는 정말 특별한 사람임에 틀림없어.
처음에 하나님이 부르심과 말씀이.. 나는 으로 바뀔 때 생기는 마음이 교만이다.
- 선민 유대민족에게 자만에 대한 끔찍한 보호망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고난이다.
‘당신은 여러 민족 중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나이다’ - ‘왜 당신은 유대인을 괴롭혀야만 하셨나이까?’
- 오스왈드 챔버스 : “영적인 삶에서 최악의 저주는 자만심이다”
- 자만은 두가지 방법으로 소명을 왜곡시킨다.
첫째, 부름 받은 사람은 소명 자체가 매우 고상한 것이기 때문에 교만에 특히 약하다.
둘째, 군중의 인간적인 칭찬을 멀리하고 유일한 청중이신 그 분 앞에서 살려는 소원 때문이다. 물론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는, 우리가 유일한 청중 앞에서 살더라도 그 청중이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일 때다.
- 우리는 부름받은 데 대해 경이감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선물이요 은혜다. 은혜는 탐식이나 정욕의 열매보다 교만의 열매를 끌어안을 때, 방탕한 막달라 마리아보다 바리새인의 영혼에 미칠 때, 자신을 부가치한 존재로 느끼는 죄인에게 다가갈 때보다 소명에 의해 더 자만해진 자만할 인간을 사로잡을 때,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된다. (사도 바울을 보라!)
- 우리 각자 속에 있는 교만이라는 죄, 즉 홀로 뽐내는 단단한 ‘자아’를 녹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은혜뿐이다. 그런데 좋은 소식은 그런 은혜가 지금도 역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15. 네게 무슨 상관이냐?
- 소명의 진리는 재능과 욕망 그리고 거의 불가피한 질투의 유혹 사이의 관계를 깊이 건드린다.
(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경쟁관계)
- 전통적으로 질투는 일곱가지 큰 죄악 중에서 두 번째로 악하며 두 번째로 만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교만과 같은 육신의 죄가 아닌 영적인 죄이며, ‘냉정하고’ 상당히 ‘모양새 좋은’ 죄다. 질투의 독특성은 그 죄를 짓는 자가 결코 즐기지 못하며, 고백하는 경우가 거의 드문 유일한 죄라는 데 있다.
- 도로시 세이어즈 : “질투는 ‘남들이 즐기는 것을 나는 왜 즐기지 못하는가?’ 라는 물음으로 시작하여, ‘내가 즐길 수 없는 것을 왜 남들이 즐겨야 하는가?’ 라는 고압적인 물음으로 끝난다.
- 소명이 질투에 약한 이유
첫째, 질투는 우리의 재능과 깊은 욕구가 소명의식과 얽혀 있는 곳에 침투한다. 우리의 욕구가 그저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는 것이 아닌 이유는 의식할 수 있는 선한 욕구와 함께 잘 의식하지 못하는 저급한 욕구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 질투는 경쟁의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소명을 타락시킨다. 질투는 교만처럼 본질상 비교하기 좋아하고 경쟁적인 속성을 지닌다.
셋째, 질투는 소명을 공격한다. 그 이유는 소명은 직접 하나님께로 돌아가는데 비해 질투는 본질적으로 불경스럽기 때문이다.
-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한 말씀을 기억하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한 사람씩 부르신다. 비교는 부질없는 짓이고, 다른 사람에 대한 억측은 시간 낭비이며, 질투는 어리석은 죄악이나 다름 없다. 우리는 개별적으로 부름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에게만 책임이 있으며, 그분만을 기쁘시게 해야 하며, 결국에는 그분으로부터만 인정받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