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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및 훈련

[새신자반요약] 강의안 8과(예배란)

8과 예배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1)

1. 예배의 어원

사람의 마음은 행동을 결정한다.’ 우리의 마음 속에 주님을 모시고 있다면, 그 마음은 진실된 예배로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예배의 바른 뜻과 의미를 알지 못하고는 참다운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불가능하다.

예배의 어원 히브리어 아바드샤하’ : 섬기다, 부복하다

헬라어 프로스퀴네오라트류오’ : 경배하다, 받들어 섬기다.

이것은 모두 종이 주인을 섬길 때 사용되는 단어들이다. 그들이 종으로서 주인을 섬기고 받들 때 자신의 인격과 존재보다도 오직 주인만이 드러나게 된다. 예배는 이처럼 경배하는 사람은 없어지고 하나님만 온전히 드러나게 하는 행위이다.

예배를 영어로 워십이라고 한다. 워십(worship)가치란 의미의 워스(worth)와 신분을 뜻하는 십(ship)의 합성어이다.

즉 워십은 최상의 존경과 존귀를, 그것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분께 드리는 행위이다. 한마디로 예배는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려드리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려드릴 때 인간은 없어지고 하나님만 드러나시게 됨은, 예배를 뜻하는 히브리어와 헬라어 단어가 갖는 의미와 동일하다.

 

2. 예배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구약시대의 제사)

1) 번제(레위기 1:1-9)

번제는 구약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제사다. 이 제사의 특징은 제물을 조금도 남김없이 온전히 불태워 버리는 것이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제물을 통해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것이다. 즉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자기부인’, ‘자기의탁이다.

흠없는 예물을 바치기 위해서는 제사를 드리기 전에, 바치려는 제물이 흠이 있는지 없는지를 반드시 살펴야 했다. 이것은 바른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준비단계가 선행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예배는 준비된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그래야 흠없는 예배가 될 수 있다. 여기에서 예외인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예배는 예배당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우리가 우리의 집에서 예배를 준비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예배는 인간보기에 좋게, 인간의 기쁨을 위하여 행해지는 종교의식이 아니다. 예배는 언제나 하나님 보시기에 좋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드려져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 시간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사람과의 약속을 넘어 하나님과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 보시기에 자신의 예배 가운데 어떤 부분이 미흡한지를 늘 점검해 갈 때, 우리의 예배는 정녕 사람 보기에도 아름답고 감동적일 것이다.

 

예배는 회개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한 주간을 돌아보며 지은 모든 범죄를 주님 앞에 회개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보혈로 변합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우리의 최상의 가치를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다.

 

번제를 드릴 때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단순히 제물을 제사장에게 드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그 제물을 잡아서 각을 뜨고 가죽을 벗기고 하는 모든 과정을 직접 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자신이 죽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제물을 잡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는 목사의 설교와 성가대의 찬양을 감상하는 시간이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죽는 시간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제물이 죽듯이 내가 죽는 완전한 굴복, 완전한 자기부인이 있어야 한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는 것이다.

 

2) 소제(레위기 2:1-2)

곡물을 제물로 하여 드려지던 소제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충성을 나타내는 제사였다. 제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충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소제는 곡물을 예물로 삼되, 그 곡물을 반드시 고운가루로 갈아야 했다. 조그마한 덩어리가 있어도 안된다. 미세한 분말이 될 때까지 갈아야 한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그렇게 곡물을 갈면서, 자신의 생각과 뜻을 하나님 앞에서 함께 갈아내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기에 그 위에 고운 기름유향을 더해야 했다. 여기서 영적으로 기름은 성령을, 유향은 기도를 의미한다. 예배는 우리의 뜻과 생각을 말씀의 절구통에 넣어 빻고 가는 시간이다. 그래서 예배 자체가 헌신이요, 충성이다. 은혜로운 예배는 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교우들의 헌신과 봉사의 결과다. 그런데도 아무 헌신도 없이 단지 예배에만 참석하겠다는 것은, 그 생각 자체가 오만이요 불충이다.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처음 익은 것으로는 그것을 여호와께 드릴지나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는 제단에 올리지 말지며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2:11-13)

하나님께 소제로 바치는 예물 속에 절대로 넣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누룩과 꿀이다. 누룩은 실제보다 부풀리는 것이고, 꿀은 그럴듯하게 당의정 포장하는 것이다. 반면에 반드시 넣어야 할 것이 소금이다. 소금은 자신이 없어져 버림으로써,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남아 있게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헌신과 봉사 속에 누룩을 넣어 자기 공적을 과장하거나, 그럴듯하게 포장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자기 홍보이지 헌신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소금이어야 한다. 자신을 다 바쳐 헌신하되 드러내 보이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감추어질 때에만 그곳에 있어야 할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3) 속죄제

속죄제는 삶 가운데에서 죄를 인식할 때마다 속죄를 위하여 드리는 제사다.

제사의 방법은 번제와 흡사하나 그 특징은 죄를 깨닫는 즉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이다. 그 다음 제삿날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즉시 드려야 한다. 제사와 삶이 분리되지 않고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에 의해 자신의 죄를 인식했을 때 왕임에도 불구하고 그 즉시 회개했던 것이 바로 속죄를 삶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좋아하셨다.

 

4) 속건제

물질과 관련된 죄를 속죄하기 위한 제사다. 속죄를 위한 제사라는 의미에서 속죄제와 비슷하지만, 속죄제가 돌이킬 수 없는 죄에 대한 속죄를 위해 드리는 제사라면 속건제는 돌이킬 수 있는 죄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위한 제사이다. 죄는 돌이킬 수 잇는 좌와 돌이킬 수 없는 죄가 있다. 다윗이 우리아를 죽인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죄지만, 과거에 10만원을 사기쳤다면 10만원을 나중에 갚아서 돌이킬 수 있는 죄이다. 이 경우에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하나님의 사하심을 받을 뿐 아니라, 당사자를 찾아가 자신이 사기쳤던 금액을 보상해주고 그에게 사죄해야 한다. 이것이 속건제이다.

하나님께서 속건제의 의무를 요구하시는 것은 물질 그 자체의 중요성 때문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물질로 인해 인간 간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혹시 물질로 인해 관계가 깨어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찾아가 사죄하라, 관계를 회복하라.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 하나님께서 말씀처럼 관계의 회복과 더불어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은혜를 부어주실 것이다.

5) 화목제

화목제의 특징은 나눔에 있다. 번제의 제물은 모두 태워져 완전히 하나님께 바쳐졌다. 그러나 화목제는 기름은 하나님 앞에서 불태우고, 제사장의 몫인 제물의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제사드리는 사람이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 따라서 화목제는 일종의 잔치제사요,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축제 제사였다. 화목제는 드리는 동기와 목적에 따라 감사제, 서원제, 자원제 또는 낙헌제로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화목제에도 지켜야할 법칙이 있다.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그러나 그의 예물의 제물이 서원이나 자원하는 것이면 그 제물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그 제물의 고기가 셋째 날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 만일 그 화목제물의 고기를 셋째 날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 드린 자에게도 예물 답게 되지 못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그 죄를 짊어지리라 (7:15-18)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법칙을 세우셨을까? 그 이유는 이러한 법칙이 없다면 인간은 절대로 이웃과 나누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쌓아놓고 아마 음식이 다 썩을 때까지 혼자 먹을 것이다. 이러한 법칙을 주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반드시 이웃과 나누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소한마리를 하루 이틀 동안에 다 먹기 위해서는 주변에 모든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한다. 즉 하나님은 미운사람, 싫은사람, 맘에 안드는 사람까지도 다 함께 나눠먹음으로 모든 제사가 인간 간의 화목으로 귀결되기를 원하신다.

예배는 반드시 사람과의 나눔, 나아가 미워하던 사람과의 화목으로 마무리되어 가야 한다. 화목을 거두어 내는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다.

그리고 참다운 예배는 오히려 우리가 예배를 끝내고 예배당의 문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윌리엄 템플은 예를 이렇게 정의한다.

'예배란 우리의 모든 인격을 하나님께 순종케 하는 것이다. 예배란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우리의 의식을 소생시키는 것이며, 그의 진리로써 우리의 생각을 자라게 하는 것이며, 그의 아름다우심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정결케 하는 것이며, 그의 사랑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여는 것이며, 그의 원하시는 뜻에 우리의 의지를 복종시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예배에서 하나로 모아지게 되며, 이것은 우리의 본성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덜 이기적인 감정이다.‘

 

쉽게 말하면 예배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께 굴복함으로, 하나님의 손길을 직접체험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성경봉독, 찬송, 말씀, 찬송>

우리가 예배시간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께 굴복하여 우리를 드릴 때마다 우리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손길은 우리를 힘껏 밀어주시고, 그 손길에 힘입어 우리는 일주일이란 인생의 고개를 휘파람을 불며 넘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 한 주간의 힘을 얻고 삶 속에서 승리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