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들

사도행전 16장 16~25절 설교(기도의 자리)

<사도행전 1616~25>

기도의 자리

예전에 조선일보 신문에 이런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제목은딸아..” 병원 앞에서 4시간 무릎꿇고 기도한 엄마..입니다.

소아마비 걸린 15살 딸 아이가 자라면서 이제 수술을 하지 않으면 평생 못걸을 수 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술은 오후230분부터 저녁7시까지 진행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병원앞 CCTV 에는 콘크리트 바닥에서 딸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잡혔습니다. 수술내내 4시간 동안이나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눈물뿌리며 기도하는 그 어머니는 수술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도 굳은 다리를 펴지 못하고 한참 뒤에야 일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어머니 리우씨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딸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뿐이었습니다” “그저 딸의 수술이 무사히 끝나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알고보니 리우씨는 딸 간호하느라 제대로된 일자리도 없고, 남편과 이혼한 상태에서 혼자 딸을 키워왔다고 합니다. 병원측은 모녀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리우씨에게 임시직을 제공하고, 딸의 병원비도 일부 지원해주기로 약속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이러한 간절한 기도가 있습니까? 시멘트 바닥이든지 콘크리트 바닥이든지 어디든지 무릎 꿇고 4시간을 기도할만한 그런 간절함이 있습니까?

10분 기도하다가 시계보고, 얼마 안됐네.. 2~30분 기도하다가 주위에 사람들이 별로 없으면 이만하면 됐지~ 하고 일어서지는 않습니까?!

이 신문기사의 주인공이 예수 믿는지 안믿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딸을 향한 사랑으로 기도하는 것을 볼 때 얼마나 간절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건강과 인생을 놓고 기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영혼을 놓고는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살면서 너무나 주변적인 것에 치우쳐 있다보면, 우리의 정말 중요한 영혼은 죽어가고 있는 것도 모른 체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 우리의 영혼이 살아야 하는데 눈에 보이는 봉사나 사역 때문에 관계 때문에 자신의 영혼이 죽어가는지도 모른체 살아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죽어가고 있는데 왜 간절함이 없습니까? 내 딸이 죽어가고 있는데 왜 간절함이 없습니까? 내가 맡은 순원이, 친구가 신앙생활을 안하게 되었는데 왜 간절함이 없습니까?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 아닙니까?!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기 때문 아닙니까?! 내가 왜 신앙생활하고 있는지도 잃어버린채 살아가고, 내가 왜 기도하는지도 모른체 기도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말씀의 첫번째는 기도의 자리를 사모하고, 기도의 목적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16)

오늘 말씀의 배경을 보면, 사도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하던 때 일어난 일입니다. 이제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유럽의 첫 성 빌립보에 들어갔습니다.

바울은 원래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고자 했는데 환상 중에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그러한 마게도냐 사람의 말을 듣고 배를 타고 유럽으로 향하게 됩니다.

마게도냐 지경의 첫 성 빌립보에서 안식일에 기도처를 찾다가 자주 장사를 하던 한 여인을 만납니다. 누구죠? “루디아입니다. 루디아와 그의 가족들이 집에서 다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바울 일행을 보고, 여기 있는 동안에 강권하여 자기 집에 거하게 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그 집에 거하면서 기도하는 곳에 가고자 합니다. 그러다가 점을 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래도 그 여종은 점을 잘 쳤는지 주인들에게 큰 이득을 남길 만큼 용하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16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큰 이익을 주는 자라

그 여종은 여러 날을 쫓아다니며 바울과 실라를 괴롭게 했습니다.

바울은 참다 참다 괴로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귀신을 여종에게서 나오게 합니다. 그러자 그 여종의 주인들이 이제 점을 못치게 되고, 돈을 못 벌게 되니까 이 모든 일의 주동자인 바울과 실라를 고발하게 됩니다. 바울과 실라는 로마 관원들에게 끌려가 옷이 찢기고 매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간수에게 든든히 지키라고 하는데 그 때 깊은 옥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도 바울과 실라가 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한 가지 깨닫는 것이 있다면, 사도 바울과 실라가 고난을 참고 감옥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것도 있겠지만, 저는 무엇보다도 바울의 의도와 목적이 분명했다는 것입니다.

16절 서두에 이렇게 나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바울과 실라는 기도하는 곳에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귀신들린 여종을 만나서 결국에는 매맞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미 처참하게 매를 맞아서 몸에 기운은 다 빠지고, 온 몸이 쑤시고, 어쩌다가 이지경이 되었나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힌 그 곳에서 바울은 처음의 목적을 잊지 않았습니다. 무엇입니까?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은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배드리러 가고, 기도하러 가는 때 꼭 유혹과 시험이 찾아옵니다. 바울처럼 환란이 찾아오고, 가정에 문제가 생겨나기도 합니다. 그 상황에서 기도가 나오겠습니까? 예배드리러 갈 수 있겠습니까?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바울이 의도하는 곳과는 전혀 다른 감옥까지 끌려가게 됩니다. 거기서 착고에 발이 매이게 됩니다. 지하감옥이라 축축하고, 썩은내가 진동하고, 곳곳에 흉악한 죄수들이 눈을 번뜩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께 기도하고자 했는데 왜 이런 곳으로 인도해주십니까? 하나님과 교제하고 은혜받고자 하는데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십니까? 안락하고 루디아 집처럼 깨끗한 곳으로 좀 인도해주시지 그러셨어요!”

바울이 그런 감옥에 갇혀서 한 것은 불평이나 원망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의도했던 일, 바로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어디서든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분명했습니다. 그러한 마음이 가득했기에 그곳이 감옥이든 어디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불이 붙기를 바랍니다. 어쩔 수 없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곳이 어디든지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수험생들 보십시오. 지하철에서도 책들고 공부합니다. 틈만 나면 책을 봅니다. 화장실이든 어디든 시험지 풀고, 답 맞춰봅니다.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면서 공부를 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수능날이라는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성도님들에게 기도해주기 위해 기도제목을 물어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뭐 물론 대부분의 기도제목이 자녀학업, 남편사업성공, 가족건강 뭐 이렇습니다. 그런데 종종 보면 기도제목을 말 못하고 우물쭈물하시는 분들이 간혹 계십니다. 기도제목을 물어보니까 당황하신거에요. 왜 당황합니까? 평소에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화살기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주 분명한 기도제목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기도응답을 한번도 받아본적이 없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왜 그럴까 보면, 분명한 기도제목 없이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기도, 확실한 기도제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나가면 흐지부지 해지고, 중언부언하게 되고, 기도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기도제목이 있어야 기도응답이 있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여러분의 영혼을 위한 분명한 기도제목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바울처럼 감옥에 갇혀서라도 기도할 줄 믿습니다. 시멘트 바닥에 4시간동안 무릎꿇고 울면서 기도했던 그 어머니처럼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밤이 그러한 기도의 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에게 오히려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17)

오늘 우리가 읽은 17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귀신들린 여종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바울과 실라를 보고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이야기하고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바울의 복음 사역에 있어서 이렇게 좋은 홍보효과를 볼 수 있을 때가 있을까 싶습니다. 하지 말라고 해도 옆에서 여종이 큰 소리로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알려주고,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이야기해줍니다.

사람들이 모였을 것이고, 바울과 실라를 주목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용하디 용한 여종이 한 말이기 때문에 어쩌면 더 많은 이들이 몰려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을 계속 듣기가 심히 괴로워서 그 귀신이 여종에게 나가도록 명령합니다. 예수의 이름 앞에 귀신은 떠나가게 되고 마침내 주변이 잠잠하게 되었습니다.

이 짧은 말씀 속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야~ 바울은 점장이에게도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받는구나!”

얼마나 신실했는지를 깨닫게 하는 장면입니다.

우리를 대적하는 이들에게 인정받기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에게 안좋은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인정받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인정받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또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인정받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신뢰를 잃기는 쉬워도 다시 신뢰를 얻기란 너무나 어렵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신임을 얻기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바울은 귀신들린 사람에게도 인정받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바울이 한 일 때문이었을까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수많은 공로를 쌓고 선행을 한 사람도 한 순간에 무너지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바울이 그 여종에게 인정받는 것은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신실하게 모시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뒤에 나오는 이야기 속에 나옵니다. 바로 매맞고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찬미하며 기도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이나 환경이 어쩌지 못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삶 속에서 누군가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싫은 소리 듣고, 쓸모없는 취급을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마음 중심에 신실하게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보십시오. 그 누구도 어쩌지 못할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보십시오.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보십시오. 그러면 어느새 나를 대적하던 사람들 조차도 신실한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해주고, 예수 믿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들과 함께할 때 믿음의 시너지효과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모든 사건 속에서 바울 곁에 믿음의 동역자 실라가 있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사실 실라 입장에서는 충분히 바울을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한 일 때문에 매맞고, 끌려와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의 원인 제공자는 바울이라고 원망해도 바울은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실라는 바울을 원망하기보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바울과 함께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름답게 찬양했습니다.

전도서 41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이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음의 동역자들이 함께할 때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읽다보면, 주인공 크리스천에게 하나님이 동행자들을 붙여주시는데 전도자를 붙여주시고, 믿음이란 사람을 붙여주시고, 소망이란 사람을 붙여주십니다. 천국을 향한 순례길에 그러한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마도 크리스천은 하늘나라 성에 닿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할 때를 보십시오. 혼자 있을 때 성령이 임했습니까? 120명의 성도들이 모여서 뜨겁게 기도할 때 불의 혀같이 갈라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오늘 다같이 모여서 기도하는 이 시간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길 소망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면 담대함이 생겨납니다.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누구를 탓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사랑과 나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자기의 것을 팔아 남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기도와 말씀의 기쁨을 체험하게 됩니다. 기도하는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기도하게 됩니다. 말씀을 들을 때도 어찌나 꿀송이처럼 단지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듣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면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서로 신앙생활하고 자신이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누다 보면,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고, 서로 속깊은 이야기까지 나누면서 믿음의 교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믿음을 함께 나눌 동역자가 있습니까? 그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릅니다. 같이 손붙잡고 기도제목을 함께 나눌 기도의 중보자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축복하셨습니다.

만약 눈씻고 찾아봐도 그러한 사람이 없다면, 먼저 여러분 자신이 그러한 동역자가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한 명 한명 찾아가 보십시오. 기도하면서 다가가보십시오.

하나님의 역사는 붙여주시는 동역자들을 통해서 엄청난 효과를 보게 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기도하면서 인내하게 됩니다. 슬픔을 반으로 나누고, 기쁨은 배가 되게 합니다. 믿음의 길에서도 쉽게 이탈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믿음의 버팀목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그러한 동역자였습니다.

우리 교회에 그러한 믿음의 동역자들이 많이 생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바울과 실라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리라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