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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들

전도서 7장 11~14절(형통한 날 곤고한 날)

형통한 날에는, 곤고한 날에는

 

성경말씀 : 전도서 711~14

11 지혜는 유업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하도다.

12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지혜는 지혜 얻는 자의 생명을 보존함이니라.

13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성경에 보면, 어린 자녀들을 믿음으로 키운 이야기가 여러 곳에서 나옵니다.

구약에 보면 아브라함의 가정이 그러하고, 모세가 너희와 너희 후손들에게 전하라고 가르쳐준 율법의 내용이 그렇습니다. 신약에서 보면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에 나옵니다.“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합니다.

생각해보면, 구약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단순히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만 고백하지 않고, 대를 이어 그 아들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그 이삭의 아들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왜 이렇게 고백할까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셔야 하고, 우리 아들이 스스로 고백하는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삶속에서 인격적으로 만난 하나님 뿐만이 아니라, 내 아들 스스로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식들의 입술로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대가 대를 이어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축복이 여러분의 가정에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하지만 자녀를 키우는 일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자녀를 잘못 키우게 되면, 하나님의 선물이 웬수가 되는 경우를 본 적이 있습니다.

교회에 한 분이 찾아왔는데 전남 화순에서 목장을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나이도 70이 넘으시고, 예전에 교직에 계시다가 부부가 퇴직하고 목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퇴직연금도 있어서 사는데 부족함이 없으셨는데, 딸이 빚더미에 앉게 돼서 받은 연금으로 빚진 이자를 갚는 것도 모자라, 파출부 일이라도 하려고 서울에 올라왔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부모님 생각을 하니까 눈물이 났습니다. 70이 넘으신 노모가 자식 빚을 갚으려고 파출부 일을 한다니까 자식이 뭔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 성도님이 하신 이야기가 아직도 귓가에 맴돕니다. 자식을 잘못 키워서 이 고생을 하는 것 같다고..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자식은 자식인가 봅니다. 지금도 저희 어머니는 전화만 하면 늘 물으십니다. “밥은 잘 먹고 다니냐? 밥 굶지 말고 다녀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가 있으십니까? 믿음으로 양육하시길 바랍니다. 자녀에게 끌려다니면, 평생 70이 넘도록 뒷치닥꺼리만 하다가 끝나는 게 인생입니다. 믿음으로 바로 설 수 있도록 철저히 교육시켜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가 있으십니까? 곁에 계실 때 효를 다하십시오~ 필요할 때만 연락하지 마시고, 그냥 용돈보내드렸다고 다가 아닙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가 훨씬 부모님을 기쁘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정에 하나님은 자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자녀를 통해 부모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하지만 자녀가 가정에 중심이 되면, 언젠가 가정은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는 이미 늦을 것입니다. 가정에서 자녀는 정말 기쁨이고 행복이지만, 그게 최고는 아닙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을 보면, 참 좋은 직업을 가지신 분들이 많습니다. 대기업 임원도 있고, 회사 사장도 있습니다. 안정적인 고위 공무원도 있고, 교육공무원도 참 많습니다.

가정이 안정이 될려면, 좋은 직장이 필요합니다. 오래 근무할 수 있는 직장이고, 복지 여건도 잘 되어 있으면 금상첨화입니다. 어떤 회사는 공짜로 외국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학비도 지원해주고, 유학도 보내주는 곳도 있습니다. 공무원들을 보면 육아휴직도 2년인가 3년 정도 된다고 합니다. 아이들을 키울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이죠.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있으면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든든한 직장, 안정된 직장을 갖고 있다고 행복한 가정 이루고 계십니까?

좋은 직장도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데 최고는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삶의 우선순위가 물질의 부요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물질이 필요합니다.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재산도 있어야 합니다. 또 부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난하게 살지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잠언서 1516~17절 말씀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돈이 많다고 해서 꼭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돈 많이 벌어서 자녀들에게 물려주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교역자로 목회를 하다보면 장례식장을 많이 가게 됩니다. 한 장례식장을 갔는데 고인이 유산을 좀 많이 남겨두고 갔나 봅니다. 보통 장례식장은 고인의 사랑과 추억을 생각하며 슬픔 가운데 진행되는데, 그 곳에서는 고성과 다툼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고인의 유산을 놓고 형제들끼리 다툼이 일어난 것입니다. 출가한 딸들과 아들의 목소리가 커집니다. 장례절차를 놓고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보면 남겨진 재산에 대한 것입니다.

형제가 똑같이 나눠야 된다, 장자가 더 많이 가져야 된다, 부모님 모셨던 동생이 더 많이 가져야 된다. 온통 그런 이야기뿐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참 사람이 싫어집니다. 가정에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게 아닙니다. 돈 벌어서 자식들 줄 때 행복할 것 같지만, 더 큰 불행에 빠지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돈이 많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수천년 전에 쓰여진 성경에서도 이미 이러한 일들을 알고 지혜롭게 기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잠언 307~9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참 지혜로운 기도입니다. 믿음의중용이 무엇인 지를 명쾌하게 알려주는 성경말씀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중심에 하나님이 있어야 합니다. 가정의 중심이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자녀도 크면 그만이고 출가하면 그만입니다. 결혼해서 애기나면 애 키워달라고 맡깁니다. 좋은 직장도 퇴직하면 그만입니다. 좋은 직장 있을 때는 사람들이 선물도 보내주고 하지만, 퇴직하면 선물을 바라는 것은 사치고, 전화한통도 없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도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가정만이 진정으로 작은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하나님을 주인 삼는 작은 천국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은 지혜자 솔로몬이 인생의 부귀영화와 많은 일들을 겪어보고 나서 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혜입니다. 지혜는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합니다.

오늘 말씀 11~12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11 지혜는 유업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하도다.

12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지혜는 지혜 얻는 자의 생명을 보존함이니라.

지혜와 돈을 비교하면서 둘 중에 더욱 아름다운 것은 지혜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정말 부자들은 자식들에게 돈을 잘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신 돈 버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합니다. 지혜로운 어부가 자식에게 물고기만 잡아서 갖다 주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스스로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300년 동안 10대가 거부로서 이름을 떨친 경주 최 부자집이 있습니다. 10대에 걸쳐 만석꾼으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재산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최부자집 사랑채에 가면 육연이라는 가훈이 있습니다. 그 교훈을 대대에 걸쳐 교육하며 생활의 지혜를 알려준 것입니다.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준 것이죠. 이것이 지혜입니다.

유대인들의 자녀 교육을 보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또 가르치는 지 모릅니다. 뼈에 새길 수 있을 정도로 교육시킵니다. 문설주에 써 붙이고, 미간에 기호를 삼아 가르치라는 것이 그냥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에 하나가 출애굽 사건입니다.

이집트에서 종되었던 삶 속에서 하나님이 건져내주셨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러한 신앙고백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 속에 지금까지 유유히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어려운 것이 뭔지 아십니까? 이 출애굽 신앙을 지켜나가는 것이 쉽지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어떠한 일을 이루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 이루었던 일들을 유지시켜나가고, 지켜나가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당대에는 잘 믿을 수 있지만, 우리 후대에 신앙을 지켜나가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신앙을 지금까지 잘 지키고, 잃었던 나라까지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다면, 우리 다음 세대에는 더욱 놀라운 부흥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두는 복된 가정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형통한 날에는, 곤고한 날에는 이라고 잡았습니다.

솔로몬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형통한 날에 기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다른 반응입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에 보니까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곤고한 날, 어려운 때, 정말 힘들고 슬플 때, 그 때는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과거를 되돌아 보고, 말씀을 되돌아 보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형통할 때가 있고, 곤고할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똑같습니다.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습니다. 사업이 잘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습니다. 가정이 행복할 때도 있고, 불행할 때도 있습니다.

결혼만 하면 좋을 것 같고, 자녀가 생기면 좋을 것 같고, 집이 생기면 좋을 것 같고, 부자가 되면 좋을 것 같지만, 다 좋을 수는 없습니다. 다 아시지 않습니까?

결혼하면 나와 아내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두 집안일까지 생각해야 됩니다. 자녀가 생기면 좋지만, 자식들 키우다가 얼마나 근심걱정하게 됩니까? 학비걱정에, 대학걱정에..

집이 생기면 좋을 것 같지만, 집값이 떨어지고, 세금이 왕창 늘어나면 걱정이 더 됩니다. 부자가 되면 편할 것 같지만, 주변에서 가만 두지를 않습니다. 신경써야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모든 일에 이 장점과 단점이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어려울 때, 힘들 때일수록 생각하고 되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러한 곤고한 날이 정말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의 40년 광야생활이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가 그랬습니다. 로마로 인해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당한 때가 그렇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에도 그랬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스데반 집사의 순교를 통해 많은 핍박과 박해를 받습니다.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서 흩어졌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었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스데반의 죽음이 남의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처럼 크게 울었습니다. 세월호에 남아 죽음을 당한 이들이 내 자식의 죽음처럼 그렇게 크게 울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사울은 교회를 멸망시키기 위해 남녀를 잡아다가 감옥에 가뒀습니다. 더 이상 살 수가 없어서 믿는 사람들은 흩어졌습니다. 교회가 와해된 것입니다. 더 이상 모일 수도 없습니다.

스데반이 죽고, 교회가 찢어지고 흩어졌을 때 그러한 곤고한 날에 그리스도인들은 크게 울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왜 신실한 스데반 집사가 죽었습니까? 왜 예수님의 교회가 핍박과 박해를 받아야 합니까? 왜 우리는 흩어져야 합니까? 도대체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오늘 전도서 말씀에서 하나님은 사람으로 그 장래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다고 나옵니다. 지금의 일어난 현상만을 가지고는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알 수 없습니다.

내일 일도 알수 없고, 바로 한 시간 후에 일어날 일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장래의 일은 사람이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흩어지고, 도망쳤습니다. 현상만으로는 실패입니다. 하지만 흩어진 그 곳에서 주의 말씀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주의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살았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할 때 중풍병자가 낫고, 앉은뱅이가 일어납니다. 더러운 귀신들이 떠나갑니다. 복음이 온 땅에 전해지고,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갑니다. 곤고한 날에 주님을 바라보며 희망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 초대교회가 지금은 전세계에 퍼졌습니다. 몇억의 크리스천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노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시길 바랍니다.

지난 주일 쇼생크 탈출영화를 다시 봤습니다. 다시 봐도 역시 명작입니다. 쇼생크를 탈출한 앤디 듀프레인이 주인공이지만, 저는 영화의 나레이션을 맡은 레드를 주목해서 봤습니다. 레드는 쇼생크에서 앤디에게 희망이란 위험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희망을 품은 앤디가 극적인 탈출에 성공합니다. 앤디가 탈출하기 전에

레드에게 한 부탁이 있습니다. 만약 레드가 감옥을 나오게 되면, 자신이 프로포즈한 장소에 가서 무언가를 꼭 찾아달라는 것입니다.

레드는 자신의 결말도 평생 동안 감옥과 현실에 길들여진 브룩스처럼 자살하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침내 레드는 감옥에서의 40년을 보낸 후 감옥을 나오게 됩니다. 마치 출애굽 광야 40년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향하는 이스라엘처럼 말입니다. 40년 동안 얼마나 길들여졌을까요? 레드는 화장실 갈때도 직장상사에게 화장실가도 되냐고 묻고 갑니다. 그렇게 길들여졌으니까요.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직장에서, 사회에서 길들여져 있습니다. 늘 하던 일을 반복해서 하다보니까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일상의 반복입니다. 가끔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을 타면, 엄청난 수의 사람이 똑같이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는 모습이 인생의 톱니바퀴를 도는 것 같아서 놀랄 때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쇼생크탈출에서 레드는 브룩스가 살던 똑같은 객실에서 생활합니다. 쇼핑센터에서 똑같은 일을 합니다. 하지만 인생의 결말은 브룩스처럼 비참하게 자살로 끝나지 않습니다. 레드에게는 앤디가 남겨준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 약속을 따라 새로운 곳을 향했을 때 레드에게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게 됩니다.

레드가 앤디를 만나지 않았다면, 고해의 바다요, 곤고한 날인 현실 속에 갇혀 살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브룩스처럼 똑같이 죽음을 택했을지 모릅니다.

우리의 인생도 고해의 바다요, 곤고한 날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희망을 노래하고,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늘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인격적인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에게는 이러한 부활의 신앙이 있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잠시 잠자는 것입니다. 어제밤 잠들었다가 오늘 아침 새롭게 일어난 것처럼 그렇게 잠시 잠든 것입니다. 스데반을 보십시오. 사도행전 760절에 스데반의 죽는 모습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은 잠들었습니다. 우리에게 닥친 환란과 고난과 핍박에도 우리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이러한 부활신앙으로 다시금 일어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가지를 기억하십시오.

첫째,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으셔서 작은 천국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자녀, 직장, 돈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 앞에 홀로 설 날이 반드시 옵니다. 그 때는 이미 늦습니다.

둘째, 자녀들에게 돈과 물질, 재산보다 지혜와 믿음을 심어주셔서 어떠한 상황에서든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다시 일어서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장래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장래일을 아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