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들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장 )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32~ 45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세 번째 예고입니다.

예수님은 왜 자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대해 세 번이나 말씀하셨을까요??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은 마가복음 831-32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두 번째는 931-32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세 번째는 오늘 마가복음 1032-34절 말씀입니다.

이 사실을 미리 아셨던 예수님은 참 당당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앞에 서서 가셨습니다.

1) 앞서 가신 예수님...

앞에서는 자들은 미리 알아야 합니다. 어디로 갈 지를..

리더의 자질은 방향과 길을 아는 것입니다. 숲을 헤쳐나갈 때 리더는 앞에서 칼을 들고 나무를 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 어디로 가야 이 숲을 빠져나갈 수 있는 지 살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믿음 생활하면서 우리가 갈 바를 분명히 알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기 싫어서 미루고 미루다가 어쩔 수 없이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누군가 한명이 어려운 일을 맡아서 한다면 자연스레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려운 일을 그 누구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뻔히 힘들게 보입니다. 좌충우돌하고, 시간 쏟고, 스트레스 받고, 쉽지 않아 보입니다.

예수님은 그 수난의 길을 향해 바로 올라가셨습니다. 그것도 미루고 미루다 가신 것이 아니라 앞장 서서 가셨습니다. 앞서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목회 30년 넘게 하신 목사님이 제가 이제 새로운 교회를 간다고 하니까 딱 한가지 노하우를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젊다고 막 달려가지 말고, 성도들과 함께 가되 딱 한걸음 앞서서 가라고 하셨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걸음 앞서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역해보니까 그 한걸음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수요예배 안나오시는 분을 수요예배에 한번 나오게 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새벽기도회 안나오시는 분을 새벽기도회에 나오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주일예배도 일있으시면 안나오시는 분한테 금요기도회 나오라고 하면 이상한 취급을 받습니다.

한걸음 앞서서 간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앞서서 가셨습니다. 수난의 길을 향해 먼저 가셨고,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 부활신앙이 있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를 하고, 오지를 향해 나아가고, 복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뻔히 어려운 길이 있습니까?! 피하지 말고 정면돌파하십시오. 이번만은 피하자.. 다음에 분명히 또 있습니다. 도리어 앞서 가십시오. 그럼 분명히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2) 귀를 닫아버린 제자들 // 주님의 음성을 들으라!

두 번째 이야기는 세베대의 아들들의 이야기입니다.

1035-40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세베대의 두 아들은 주의 영광 중에서 주의 우편에,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예수님의 왼팔 오른팔이 되게 해주십시오~ 하고 요청한 것입니다. 다른 열 제자는 이 소식을 듣고 분히 여깁니다. 화를 낸 것이죠. 왜냐하면 질투가 났기 때문입니다. 저희 둘만 좋은 자리 앉으려고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왜 야고보와 요한은 주의 영광 중에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했을까요??

예수님이 이미 수난받으실 것을 8,9,10장에서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도 예수님의 좌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러한 요청은 야고보와 요한이 둘 중에 하나를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죽음과 고난을 알고도 함께 그 고난에 동참하겠다는 놀라운 믿음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모든 수난이야기는 생각지도 않고, 예수님이 왕이 되고 이 세상을 다스리시게 된다면 그 영광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리고 실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의 잡히시는 장면을 돌이켜 볼 때 안타깝게도 야고보와 요한의 요청은 후자 였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힘들고 어렵고, 자기에서 불필요한 얘기는 듣지도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들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 나 자신에게만 좋은 것은 듣고, 힘들고 어렵고 부담스러운 것들은 잘 귀담아 듣지를 않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나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을 골라서 듣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무섭고 싫은 것들은 생각조차도 않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칭찬을 들으면 좋습니까? 하지만 비난을 들으면 인상부터 쓰게 됩니다. 그냥 안좋은 소리를 들으니까 기분 나쁜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충고여도 자신의 단점을 이야기하면 귀를 닫아버리는 게 바로 인간입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나머지 열제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난, 수난, 죽음에 관해서는 귀를 닫아버렸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예수님이 잡히시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시자, 모두 도망치고, 절망했습니다. 이제는 다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음성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세 번이나 묻습니다. 그 물음을 오늘도 우리에게 하십니다. 아무개야, 네가 진정 나를 사랑하느냐?

그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이고 눈물흘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3) 받고자 하는 세베대의 아들들과 열 제자들 // 주시려는 예수님.

그리고 이 이야기를 45절까지 읽어보면,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동사의 차이입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은 주옵소서.. 예수님께 요청하였습니다. 구하였습니다.

주옵소서. 주기를 원합니다. 주시옵소서.. 어디서 많이 듣던 말 아닙니까?!

우리의 대다수의 기도의 말미에 붙이는 말입니다. 주시옵소서...

하지만 예수님은 4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주시옵소서가 아니라.. 주려 함이니라.. 주신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주겠다. 내가 하겠다. 라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은 주시옵소서. 예수님은 내가 대속물로 주겠노라. 말씀하십니다.

오늘 날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주시옵소서 입니까? 아니면 주여, 내가 하겠습니다. 하고 순종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사람이 바뀌는 이야기는 참 가슴 설레게 합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가 그랬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모를 때는 세리장이요 부자로, 같은 이스라엘 민족의 등을 쳐먹고 사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자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주시옵소서가 아니라.. 내가 하겠나이다로 바뀌는 순간이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내가 하겠습니다. 변화되는 믿음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오늘도 말씀으로 깨우쳐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님! 이번 사순절을 통해 주님의 십자가 사랑 다시금 회복시켜 주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품에 안아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케 하옵소서. 이제껏 내가 원하는 것만 듣고 살았다면, 이제는 우리의 마음과 두 귀를 열고 주님의 음성듣기를 원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그 음성에 화답해 주님의 뜻대로 살기로 다짐하는 귀한 사순절이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주신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