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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세미나(성경과 종교개혁) chapter 10. 성경과 종교개혁 성경은 서구문명의 중심에 잇는 문서이며, 기독교사상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교육과 문화에 끼치는 영향력의 원천이기도 하다. 종교개혁은 성경에 밀착하는 일의 중요성을 새롭게 깨달았다. 혹은 어쩌면 성경의 중요성에 대한 고대의 견해가 회복되는 것을 경험했다.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의 사상은 기독교 황금시대의 실천과 신앙의 길로 교회를 되돌리려고 노력하는 개혁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슬로건의 하나가 되었다. 만일 믿음만에 의한 칭의 교리가 종교개혁의 질료적인 원칙이었다고 한다면, ‘오직 성경으로’의 원칙은 형식적인 원칙이었다. 종교개혁운동의 모든 갈래들은 성경을 개혁사상과 그 실천을 위해 준수해야 할 목표물로 여겼다. 1. 중세시대의 성경 중세 신학자들에.. 더보기
종교개혁자(존 칼빈) chapter 9. 종교개혁자 존 칼빈 1. 존 칼빈 신학계에서는 사도시대 이후 기독교사상 가장 두드러진 공헌을 한 대표적인 두 인물로 성어거스틴과 칼빈을 지적한다. 특히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루터는 종교개혁운동의 행동적 주역으로, 칼빈은 사상적 주역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칼빈의 신학사상은 오늘날까지 개혁주의 신학과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대표적 체계로 받아들이고 있다. 칼빈은 프랑스의 종교개혁가로, 프랑스식으로는 깔뱅이라고도 한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에 성공하고 신정정치적 체제를 수립하였으며,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화시킨 그의 저서 ‘기독교강요’는 복음주의 신학의 핵심저술이다. 존 칼빈(John Calvin)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약 100km 떨어진 피카데리(Picardy) 지방 .. 더보기
종교개혁자(울리히 쯔빙글리) chapter 8. 종교개혁자 울리히 쯔빙글리 루터와 칼빈의 그늘에 서 있던 쯔빙글리(Ulrich Zwingli,1484-1531)는 종교개혁의 셋째 인물, 혹은 심지어 잊혀진 종교개혁자라고 불리운다. 독일에서 루터에 의하여 종교개혁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스위스에서는 쯔빙글리에 의한 종교개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쯔빙글리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전부터 로마교회의 많은 가르침과 의식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교훈들과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확신하였다. 그의 이러한 확신은 초기 교부들의 저술들과 후스와 위클리프의 저술들을 읽음으로써 더욱 분명해졌으며, 종교개혁을 갈망하게 되었다. 루터가 신앙과 교리를 기초로 성경과 함께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성경이 명백하게 금하지 않은 것은 허용될 수 있다는 생각 하.. 더보기
종교개혁자(필립 멜란히톤) chapter 7. 종교개혁자 필립 멜란히톤 1. 필립 멜란히톤(1497~1560년) 종교개혁 하면 루터와 칼빈을 생각한다. 둘은 종교개혁의 영웅이다. 사람이 기억하는 영웅은 멋지고 장엄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보통 사람이라면 포기할 일을 해낸다. 대단한 능력, 탁월한 언변과 지도력, 굳센 의지와 끈기로 세상을 바꾼 사람을 기억한다. 강력하게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기억에 남지만 조용히 뒷정리하는 사람은 잊힌다. 멜란히톤이 그런 사람이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선봉에 섰다. 칼빈은 극단적인 모습까지 보이며 개혁을 이끌었다. 멜란히톤은 중도 노선을 걸었다. 당시에 백성에게 존경 받는 중도주의자가 있었다. 천주교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극단적인 방법을 쓰지 않았다. .. 더보기
종교개혁자(마틴 루터) chapter 6. 종교개혁자 마틴루터 1. 마틴 루터(1483~1546년) 루터는 독일 태생인데, 종교개혁 이전의 독일 사회는 아주 기독교적인 사회였다. 거리마다 교회가 있었고, 교회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신자들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제를 찾았고, 사제는 산 자의 죄만이 아니라 죽은 자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기도하곤 하였다. 중세 시대에 사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였다. 사제의 속죄 권한에 대한 미신 때문에 중세인들은 사죄 받는 최선의 길이 수도승이 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보통 신자로 살아서는 이 땅에서 예수님의 명령을 완전히 이룰 수는 없지만 수도 생활을 통해서는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사상이 만연하여, 많은 사람들은 수도승이나 수녀가 되려고 하였다. 중세인들에게 있어 수도자로서의.. 더보기
종교개혁자(존 위클리프) chapter 5. 종교개혁자 존 위클리프 1. 존 위클리프 수백년 동안 금단의 영역으로 지켜져 온 중세 로마 카톨릭의 폐단과 악습, 부정과 부패의 철옹성을 무너뜨리는 종교개혁은 그만큼 서구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그런데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까지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수많은 선각자들의 수고와 노고가 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중 흔히 종교개혁의 샛별이라 불리고 있는 ‘존 위클리프’(John wyclif, 1329-1384년)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1. 아름다운 청년 위클리프 “종교개혁의 샛별”이라 칭해지는 이 유명한 개혁자는, 1329년, 영국의 북부지방 요크셔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문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지만, 그의 부모는 위클리프를 교회 일꾼으로 키.. 더보기
종교개혁자(얀 후스) chapter 4. 종교개혁자 얀 후스 1. 얀 후스 1372년경 유럽의 작은 나라 보헤미아(지역적으로 오늘날의 체코슬로바키아와 유사함)의 남쪽 어느 작은 마을, 가난한 가정에서 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가난했지만 매우 총명했던 이 아이는 다행히 교회에서 배움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아이가 난로 옆에 앉아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읽던 중, 벌떡 일어나 그의 손을 난로 불 속에 집어넣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어머니가 아들의 몸을 끌어 당겨 큰 화를 면하긴 했지만, 놀란 어머니를 향해 이 아들은 담담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어느 정도로 순교의 고문을 견딜 수 있을지,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의 어머니는 이 아이가 사제가 되기를 원하였으므로 교회 성가대에서 성실하게 .. 더보기
종교개혁 세미나3(인문주의와 종교개혁) chapter 3. 인문주의와 종교개혁 1.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종교개혁이 일어나는데 기여한 여러 가지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르네상스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종교개혁이라는 주장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늘 나오는 이야기가 르네상스와 인문주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의 인문주의는 사실 세속주의에서부터 무신론으로 연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14~16세기의 인문주의자들은 상당한 정도로 종교적이었으며, 그들은 기독교회를 철폐하는 쪽보다도 오히려 갱신하는 쪽에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르네상스 후기의 정황에서 이러한 현상을 접하고자 한다면 ‘인문주의’라는 말의 현대적 의미를 제쳐둘 필요가 있..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