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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및 훈련

종교개혁 세미나(성경과 종교개혁)

chapter 10. 성경과 종교개혁

성경은 서구문명의 중심에 잇는 문서이며, 기독교사상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교육과 문화에 끼치는 영향력의 원천이기도 하다. 종교개혁은 성경에 밀착하는 일의 중요성을 새롭게 깨달았다. 혹은 어쩌면 성경의 중요성에 대한 고대의 견해가 회복되는 것을 경험했다.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의 사상은 기독교 황금시대의 실천과 신앙의 길로 교회를 되돌리려고 노력하는 개혁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슬로건의 하나가 되었다. 만일 믿음만에 의한 칭의 교리가 종교개혁의 질료적인 원칙이었다고 한다면, ‘오직 성경으로의 원칙은 형식적인 원칙이었다. 종교개혁운동의 모든 갈래들은 성경을 개혁사상과 그 실천을 위해 준수해야 할 목표물로 여겼다.

 

1. 중세시대의 성경

중세 신학자들에게 성경은 기독교 교리를 위해 실질적으로 충분한 자료였다. 중세신학자들이 말하는 성경은 4세기말과 5세기초에 위대한 교부 성경학자 제롬이 번역한 불가타성경’(textus vulgatus)을 뜻했다. ‘불가타는 일반화되지 못하다가 6세기에 이르러 제롬이 준비했던 특정의 라틴어 번역을 가리키는 용어로 완벽하게 용인되었다. 그러다가 성경의 표준화를 위해 1226년 파리 신학자들과 출판업자들에 의해 불가타파리판이 상업적인 용도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불가타 성경과 원어 성경 사이에 오류와 차이는 인문주의자들에 의해서 밝혀지게 되었다. 이러한 불가타 성경을 번역했던 성경 중에 하나가 존 위클리프가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들이 영어성경을 번역한 동기는 영적으로 평신도들도 하나님의 율법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고, 정치적으로는 암묵적으로 교회의 가르치는 권위에 도전 하는 것이었다. 존 위클리프처럼 자국어 번역본들이 중요하더라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모든 번역본들이 불가타성경의 번역본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원어로 된 최선의 성경사본에 근거하지 않았고, 불가타 역을 그 모든 약점과 오류와 함께 근거로 삼았다.

인문주의자들이 성경연구에 공헌한 요소

1) 근원으로(Ad Fontes) 돌아갈 필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성경의 우선성이 후기 주석들보다 더 강조되었고, 성경 본문에 대한 접근이 해설들이나 주석들의 복잡한 체계를 통하는 대신 직접적으로 이루어졌다.

2) 성경은 라틴어 번역본보다 원어로 직접 읽혀졌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연구되었고,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읽혀졌다. 이러한 성경 원어에 대한 새로운 흥미와 언어 이해력은 불가타에 있는 심각한 번역 오류들을 다수 노출시키게 되었다.

3) 인문주의 운동을 통해 성경연구의 새 방법을 열 수 있는 두 가지 길이 열렸다. 하나는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성경(1516)이고, 둘째는 고전 언어의 매뉴얼을 습득할 수 있도록 히브리어와 헬라어 입문서들이 출판되게 된 것이다.

4) 인문주의 운동은 본문비평 기술을 발전시켜 성경의 가장 좋은 본문을 정확하게 수립할 수 있게 했다.

5) 에라스무스가 1515년에 출판한 <엔키리디온>에서 성경에 학식이 잇는 평신도가 교회를 갱신시키는 열쇠를 쥐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작품에서는 성직자와 교회가 무시되고 성경을 읽은 평신도가 기독교 신앙의 진수로, 특히 실천의 진수로 더 적절하게 안내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이러한 견해는 유럽 평신도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유포되었고, 1519-1525년 기간에 루터와 쯔빙글리가 성경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길을 예비했.

 

2. 성경과 종교개혁

17세기 영국 개신교인인 윌리암 칠링워스는 기록하기를, “프로테스탄트의 종교는 오직 성경이다라고 하였다. 쯔빙글리는 우리 종교의 기초는 기록된 말씀, 하나님의 성경이다라고 썼다. 칼빈은 그러면 이것이 확실한 금언이 되게 하라. 교회에서 허락할 것이 하나님의 말씀 외에 아무것도 없게 할 것이며, 먼저 선지자의 율법에, 다음으로 사도들의 글에 들어있는 말씀을 지킬것이며, 그의 말씀의 명령과 지배를 받는 것 외에 교회에서 달리 가르치는 방법이 없게 하라라고 말하였다.

종교개혁자들과 중세신학의 차이는 성경에 어떠한 지위를 부여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이 어떻게 규정되고 해석되는가의 문제였다.

1) 성경의 정경성

정경이란 말은 교회가 진정한 것으로 인정하는 성경을 가리킨다. 그 원어적인 의미는 헬라어로 'kanon'인데 자 혹은 기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성경이 구약을 의미하듯이 중세신학자들에게 성경불가타성경을 뜻한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이런 판단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한 일이 히브리성경의 구약성경과 다른 한편에 헬라어나 라틴어 성경인 불가타 성경을 놓고 비교했다. 그러자 히브리성경에 없는 다수의 책들이 후자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개혁자들은 정경에 속한 것으로 인정할 만한 구약의 책들은 오직 히브리성경에 본래적으로 포함되어 있던 것들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하여 구약성경외경이 구별되었고, 구약은 히브리성경에 나오는 책들로 구성된 반면, 외경은 헬라어나 라틴어 성경에 있으면서 히브리 성경에는 없는 책들로 구성되었다. 예를 들면, 토비트, 유딧, 마카베오상, 집회서, 바룩 이다.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성경이란 용어가 실제로 의미하는 것을 이해하는 일에 대해 근본적인 구별이 내려졌다. 이러한 구별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의 번역본-새 개정표준성경(New Revised Standard Version, NRSV)새 국제성경(New International Version, NIV)이 있다-과 로마가톨릭의 번역본-예루살렘성경(Jerusalem Bible)-을 비교하면 이러한 차이점들이 드러난다. 개혁자들에게 오직 성경의 원칙은 그들과 가톨릭 사이에 단순히 한 가지만이 아니라 두 가지의 차이점들이 있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성경에 다른 지위를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성경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견해를 달리했다. 성경의 형성사 참고

2) 성경의 권위

개혁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하나님의 말씀과의 관계에 두었다. 칼빈의 시각에서 성경의 권위는 성경 기자들이 성령의 비서였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었다. 쯔빙글리의 후계자인 하인리히 불링거가 말했듯이 성경의 권위는 절대적이고 자율적인 것이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 안에 그리고 성경 자체로서 합당한 지위와 신뢰성을 갖고 있다”. 곧 성경은 스스로 말할 수 있는 것, 16세기의 부적절하고 부정확한 표출에 도전하고 고칠 수 있는 것이었으며, 여기에 기쁜 소식이 있었다.

많은 점들이 오직 성경의 원칙의 중요성을 드러냈다. 첫째, 개혁자들은 교황과 공의회와 신학자들의 권위가 성경에 복속된다고 주장했다. 성경이 말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은 반드시 교부들이나 공의회들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루터는 중세신학의 혼란과 모순을 강조함으로써 오직 성경의 원칙을 변호하는 경향을 보였다면 칼빈과 멜랑히톤은 어거스틴의 신학과 같은 최고의 보편적인 신학이 성경의 우선성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둘째, 개혁자들은 교회 내부의 권위가 직분자의 지위로부터 오지 않고 직분자가 섬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온다고 주장했다. 가톨릭의 전통은 직분자의 권위의 기초를 직분 자체에 두며 주교직이 사도시대와 역사적 계속성을 지닌다는 점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면 수제자 베드로의 직계를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개혁자들은 주교의 권위의 기초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실성에 두었다.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한 선포와 관련해서 보면 역사적 연속성이 거의 중요하지 않다. 종교개혁으로 떨어져나간 교회들은 분명히 가톨릭교회 제도와의 역사적 연속성을 부인했다. 가톨릭이 역사적 연속성을 강조했을 때, 대등하게 개혁자들은 교리적 연속성을 강조했다. 종교개혁자들과 초대교회 감독들 사이를 잇는 역사적 연결고리가 없었을 수도 있었지만, 개혁자들은 초대교회 감독들이 했던 것과 동일한 신앙(말씀)을 믿고 가르치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단연코 필요한 연속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결국 성경이 무엇인지 정의한 것은 교회였다. 이 사실은 교회가 성경 위에 그리고 독립된 권위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래서 1519년의 유명한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루터와 대적했던 존 엑크가 성경이 교회의 권위가 없이는 진정성을 가질 수 없다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이것은 명백히 성경과 전통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3) 전통의 역할

오직 성경의 원칙은 무엇이든 전통에 아무런 역할도 배정하지 않는 신학 이해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런 이해를 급진적 종교개혁이라고 볼 수 있고, 이러한 편에 섰던 사람들은 재세례파, 농민전쟁을 주도했던 토마스 뮌쩌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은 급진파들은 각 사람이 원하는 대로 성경을 해석할 권리, 성령의 인도에 복종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개인의 사적 판단이 교회 공동의 판단 위로 높여지면서 이렇게 개인주의를 향한 길이 열렸다. 두 번째 전통으로는 세속권력의 지지를 받아 관 주도적 종교개혁을 들 수 있다.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관 주도적 종교개혁은 교회의 대부분의 교리들-기독론과 삼위일체론 등-을 그대로 존속했고 많은 전통적인 의식들-유아세례 등-도 성경에 옳다고 확신했기에 그대로 유지되게 되었다. 관 주도적 종교개혁은 개인주의의 위협을 고통스럽게 의식하고 있었고, 교회의 전통적인 성경해석이 옳다고 여겨지는 경우 전통적 성경해석을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위협을 피하고자 하였다. 교리 비판은 가톨릭 신학이나 의식들에서 성경으로부터 크게 벗어났거나 성경에 어긋나는 것으로 나타난 부분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종교개혁의 주류에서 어느 정도 다양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쯔빙글리는 칼빈보다 급진적 입장에 가까웠으며, 루터는 가톨릭의 입장에 가까웠다. 그러나 반드시 강조할 것으로서 급진적인 대안을 선호하여 전통적인 성경해석의 개념을 포기하려 했던 사람은 없었다.

4) 성경해석법

성경 본문들은 해석될 필요가 있다. 만일 어떤 본문의 의미에 대해 심각한 견해차가 있다면 그 본문은 권위 있고 규범적인 것으로 다루어질 수 없게 된다. 중세 후기에 성경해석자로서 교회의 역할에 점점 더 강조점이 주어졌다. 성경의 권위는 그 해석자, 곧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있는 교회의 권위에 의해 보증되었다. 그러나 중세 후기에 신학적 권위의 본질과 위치에 대한 이 같은 교리상의 혼란과 불일치가 존재하여 누가 궁극적으로 성경해석의 권위를 갖는가의 문제가 매우 불투명해졌다.

중세 시대에 사용된 성경해석법의 표준은 성경의 사중 의미라고 알려져 있다.

문자적 의미 : 본문의 표면적 가치를 취한다.

풍유적 의미 : 성경의 특정 구절들이 교리를 진술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 구절들은 명확하지 않거나 신학적인 이유에서 독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문자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경향이 있다.

비유적 혹은 도덕적 의미 : 특정 구절들이 그리스도인이 수행할 윤리를 안내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신비적 의미 : 특정 구절들이 그리스도인의 희망의 근거를 지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장차 새 예루살렘에서 신의 약속들이 성취될 것을 지향하고 있다.

 

루터는 1515년에 이 원칙에 대해 이렇게 진술했다. “성경 어느 부분에서든지 같은 진리가 문자적으로 명백하게 진술되지 않고서 타당하다고 인정받을 풍유적비유적신비적인 의미란 없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은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래서 루터는 시편 분석을 예로 들면서, 성경주석 작업에서 죽이는 문자생명을 주는 영을 구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죽이는 문자에 의한 역사적 의미

1) 문자적: 가나안 땅

2) 풍유적: 그곳에 있는 회당, 혹은 뛰어난 인물

3) 비유적: 바리새인의 의와 율법

4) 신비적: 땅 위에서 얻을 장래의 영광

생명을 주는 영에 의한 선지자적 의미

1) 문자적: 시온백성

2) 풍유적: 그들 가운데 있는 교회, 혹은 뛰어난 인물

3) 비유적: 믿음의 의

4) 신비적: 하늘에서의 영원한 영광

에라스무스의 성경적 해석은 성경의 문자가 아닌 그 기저의 의미를 세우는 것과 관계되는데 쯔빙글리는 이러한 것을 받아들여 성경해석자는 성경의 자연스런 의미를 세울 것을 요청받기에 반드시 성경의 문자적 의미와 동일시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최후의 만찬에서 그리스도가 떡을 떼며 하신 이것이 내 몸이니라”(26:26)를 볼 때, 이 구절의 문자적 의미는 이 떡 조각은 나의 몸이다가 될 것이지만, 자연스런 의미는 이 떡 조각은 나의 몸을 상징한다이다.

중요한 것은 에라스무스와 부써와 쯔빙글리가 성경의 도덕적비유적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인문주의자들이 복음이 우선적으로 삶의 길을 지시한다는 생각에서 아주 벗어나려 하는 태도로 기독교를 대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이 보여준 도덕적 외형은 성경에 의해서 그려진 것이었다.

성경의 비유적 의미에 대해 에라스무스와 부써는 신자가 반드시 행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한 데 반해, 루터는 신학적인 돌파의 순간에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을 위해 하시는 것으로 정의했다. 사실 대중의 수준에서는 이 학문적인 운동이었던 종교개혁이 설명되고 사용되기가 어려웠다. 종교개혁은 모든 사람이 성경을 해석할 권리를 가지며 교회의 현재의 가르침과 의식을 문제 삼을 권리를 가진다고만 힘써 선포함으로써만 진행되어갔다고 말할 수 있다.

5) 성경해석의 권리

관 주도적 종교개혁이 일반적으로 합의했던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용기라는 것이었다. 이 말씀은 과거의 한정된 시점에 유일회적으로 주어졌을지라도 성령의 인도를 통해 모든 세대에 의해 밝혀지고 사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

루터는 개혁 프로그램을 위한 원칙 중에 하나가 믿음을 지닌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해석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루터는 보통의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읽을 완전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 그 지면에서 발견하는 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쯔빙글리도 하나님의 말씀이 개인의 이해력을 비추는 순간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방법으로 말씀이 빛을 낸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부르크에서의 성만찬 논쟁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아주 단순하다고 여겼던 그런 성경구절들의 해석에서도 일치를 이루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후에 일반 그리스도인이 오직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에 능숙하며, 복잡한 언어학적 이론들에 익숙한 경우에만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가톨릭측의 입장에서는 성경이 해석하기 어려우며 그런 까닭에 하나님은 섭리 속에서 신뢰할 만하고 권위있는 해석자를 로마 가톨릭교회의 형태로 공급해주셨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급진적인 개혁자들은 이런 생각을 모조리 거부했다. 모든 개별 신자는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성경을 해석할 권리와 능력을 갖고 있다. 이에 대해 관 주도적 종교개혁자들은 일종의 당혹감을 느꼈다. 그래서 어떻게 프로테스탄트 공동의 권위 있는 성경해석을 할 지에 대해 두 가지 방법을 강구했다.

첫 번째는 요리문답의 접근법이라고 할 수 있다. 루터의 소요리문답과 칼빈의 기독교강요였다. 칼빈은 루터의 요리문답을 모델로 해서 기독교 강요를 썼다고 한다.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나타난 성경 사용법이 매우 설득력이 커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올바른 성경해석의 열쇠를 가진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두 번째는 정치적인 해석의 접근법이다. 이것은 쯔빙글리의 취리히 종교개혁과 연관되어 있다. 이 방법은 종교개혁의 정치사와 관련하여 특별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성경해석하는데 있어서 논쟁과 토론 속에서 시의회가 결정하는 권한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쯔빙글리와 취리히 시의회와 취리히 교회는 사실상 하나였고 공동체였다. 결국 시의회는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문제들에 개입할 권리를 갖게 되었고,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더 이상 올바른 성경해석에 관한 문제로 구애받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 1530년대 중엽에 제네바를 정치적으로 안정시킴으로써 간접적으로 칼빈의 종교개혁의 성공을 이끌었다.

실제적으로 모든 사람이 신실한 성경을 해석하는 권리와 능력을 갖고 있다는 이념은 결국 오직 급진파들만의 소유가 되었다. 관 주도적 종교개혁자들도 처음에는 각 사람이 성경해석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후에 토마스 뮌쩌의 농민반란과 일부 개별신자들의 성경을 해석할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는 일정의 교육과정을 수료한 이후에 성경을 해석할 수 있도록 규정하게 된다. 그래서 보통의 학생들에게는 루터의 소요리문답을 읽도록 규정하고, 라틴어와 헬라어를 습득한 이후에 신약성경을 읽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