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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및 훈련

종교개혁자(얀 후스)

chapter 4. 종교개혁자 얀 후스

1. 얀 후스

1372년경 유럽의 작은 나라 보헤미아(지역적으로 오늘날의 체코슬로바키아와 유사함)의 남쪽 어느 작은 마을, 가난한 가정에서 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가난했지만 매우 총명했던 이 아이는 다행히 교회에서 배움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아이가 난로 옆에 앉아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읽던 중, 벌떡 일어나 그의 손을 난로 불 속에 집어넣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어머니가 아들의 몸을 끌어 당겨 큰 화를 면하긴 했지만, 놀란 어머니를 향해 이 아들은 담담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어느 정도로 순교의 고문을 견딜 수 있을지,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의 어머니는 이 아이가 사제가 되기를 원하였으므로 교회 성가대에서 성실하게 봉사하며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이 아이는 프라하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 마침내 신부가 되었고, 교수의 직분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의 강의는 점점 더 좋은 평판을 얻게 되었고, 당시 지식인들의 열렬한 지지와 환영을 받으며, 마침내 그 대학의 학장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가 서른네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얀 후스였습니다.

얼마 후 얀 후스는 프라하에 있는 베들레헴 성당의 주임 신부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성당은 한 부유한 상인에 의해 설립된 예배당이었는데, 개혁적인 설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얀 후스는 도시의 유력인사들이 많았던 그 성당에서 라틴어 대신 자신의 모국어로 기도하며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중세에는 모든 서방의 교회에서 자국의 말이 아닌 라틴어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예배에 참석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제대로 뜻도 모른 채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상고하기보다는, 주로 눈에 보이는 예식이나 그림, 조각 등이 발달하게 된 것이다.

만일 우리도 우리말이 아닌 어려운 다른 나라 말로, 예를 들어 영어나 중국어로 예배가 진행된다면,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 능동적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형식과 겉모습은 그럴싸하게 꾸밀 수 있겠지만, 생각하며 의미 있게 예배를 드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말로써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는 것이 얀 후스의 신념이었다. 이같은 소문이 퍼지자 점점 더 많은 시민들이 베들레헴 성당으로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저들은 자신들의 모국어로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이미 이때부터 로마 교황청으로부터의 종교적 독립을 선언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당시 보헤미아 교회를 포함한 전 세계교회는, 로마 교황청에 종교세를 바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교수이며 젊은 신부였던 얀 후스의 눈에 로마 교황청은 타락과 부패의 온상일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왜 우리가 저런 로마 교황청에 종교세를 바쳐야 하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로마교황청을 비판하는 설교를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얀 후스는 위대한 스승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신학박사였던 존 위클리프였는데, 그의 저서들이 프라하에 소개되어, 얀 후스는 위클리프의 개혁사상에 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위클리프 박사에 대한 당시의 평판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교회 일각에서는 그를 이단이라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후스도 처음에는 편견을 가지고 그의 저서를 읽기 시작했으나 위클리프의 저서를 탐독하면서 얀 후스는 점점 더 위클리프의 사상에 심취하게 되었습니다. 위클리프 박사는 당시 타락한 성직자들의 부패상을 고발하면서, 저들을 향하여 세속적인 권력을 포기하고 어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충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신부의 말보다 성경의 말씀이 더 우선한다! 따라서 성경 말씀을 세계의 모든 언어로 번역하여 성도들이 직접 예수님의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위클리프의 이 한마디가 얀 후스 교수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후스는 곧바로 위클리프의 저서들을 교회와 대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점점 더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그에게로 몰려와 그의 강의와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그의 영향력도 커져만 갔습니다.

그러나 이내 사탄의 방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프라하의 대주교가 프라하 대학에 있는 위클리프의 책들을 모두 불태우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양심적인 학자요 말씀에 철저했던 존 후스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프라하 대학은 학문의 자유가 보장된 대학으로 소문이 나 있었고, 전 세계로부터 젊은 지성들이 몰려오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프라하 대학에서, 이런 반지성적인 사태가 벌어지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프라하의 대주교를 반대한다고 분명하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그의 주변에 대주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만의 힘으론 역부족이었습니다. 로마 교황청의 지령을 받은 대주교는 끝내 위클리프의 책을 거두어 모조리 불태웠던 것입니다. 그 책들을 태워버리던 날, 후스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불 가지고 진리를 태울 수는 없습니다. 숨도 쉬지 않고, 남에게 그 어떤 해도 주지 않는 물건을 향하여 화를 내는 것은 소인배들의 소치입니다. 불로 진리를 태울 수는 없습니다.’

그 사건 이후, 얀 후스는 보헤미아를 대표하는 지성인이요 중세의 암흑기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개혁의 대표주자로 부각되었습니다. 수많은 동료 교수들로부터 시민들에 이르기까지, 또한 봉건 영주들과 귀족들까지, 그리고 보헤미아 왕과 여왕까지도 교회에 나와 그의 설교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보헤미아에 새 역사가 시작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로마로부터 보헤미아 왕가에 압력이 가해졌고, 결국 왕과 여왕은 이 용감한 교수를 공적으로 지지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심각한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얀 후스가 가르치던 대학의 학생 세명이 로마교황청을 대변하는 모 신부의 설교를 듣던 중, 중간에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저 신부의 말은 거짓말!’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문제는 거짓말을 거짓말이라 한다 해도, 예배 중에 그렇게 소리치는 것은 당시 교회법에 저촉되는 행위였습니다. 결국 그 학생들은 곧바로 체포되어 투옥되었습니다. 중세의 교회법은 가장 엄격한 법으로, 중세의 수많은 고문들과 처형방법은 대부분 종교재판에 사용된 것들이었습니다. 비록 저들이 철없는 학생들이기는 했지만, 예배 설교 중에 일어난 초유의 사건을 교회가 어떻게 처리할지 온 시민의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얼마후 그 학생들의 부모가 얀 후스 교수를 찾아왔습니다. 교수님만이 아이들을 구해낼 수 있을 것 같으니 어떻게 손 좀 써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얀 후스는 그길로 당국자들을 찾아가 호소했습니다. 담당판사는 대학교의 교수가 학생들의 반역을 공개적으로 옹호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충격을 금할 수 없다!’는 말을 하면서, 그래도 교수가 와서 선처를 호소하니, 관용을 베풀어 주겠노라 약속해 주었습니다.

마침내 약속된 날, 프라하 시민들 모두가 감옥에서 풀려나는 용감한 학생들을 맞이하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관용을 베풀겠다고 약속했던 치안판사는 그 학생들을 뒷문으로 끌고 나가더니, 그 자리에서 사형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얀 후스는 물론 모든 시민들은 경악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막강한 힘 앞에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학생들의 장례식을 치르던 날, 오열하는 부모와 시민들 앞에서 얀 후스 교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얀 후스는, 아무리 억울해도 폭력적 방법으로 악을 응징하려 해서는 안된다고 당부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더 높은 재판소에서 저들이 재판받게 하십시오.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해야할 일입니다.’

인간의 잔혹함과 비정함에 극도로 실망한 얀 후스는 그 길로 낙향하고 맙니다. 그는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골로 내려가 자연 속에서 다시한번 위클리프 박사의 책들을 정독하며 어떻게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지 심사숙고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떠난 프라하에서는 여전히 얀 후스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식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얀 후스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기운이 보헤미아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감지한 로마교황청에서 프라하의 추기경에게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보헤미아의 이 선동가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서슬퍼런 교황청의 추궁에 프라하의 추기경은 이렇게 답신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행동은 엄격하고 근엄합니다. 그의 삶은 자기를 부인하며 살아야 할 성도의 표본이며, 또한 불의를 멀리하는 삶의 표본이기에 그 누구도 그를 비난하거나 그에게 대항하지 않습니다. 또한 키가 크고 수려한 용모를 지닌 그를 모든 사람이 사랑하며 추종합니다. 특히 천한 사람들까지 구제하려고 애쓰는 그를 사람들은 성자라고 부릅니다. 어리석은 일임에도 분명하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저들은 그가 성자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답신 가운데 성자라는 단어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것이면 충분하다. 이 건방진 가짜 성자가 진짜 성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증명해야 한다.’ 결국 프라하의 추기경이 써 보낸 답장의 단어 하나를 빌미로, 로마교황청은 얀 후스를 파면합니다. 그는 이제 파문당한 신부가 된 것입니다. 이제 그는 설교를 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줄 수도 없게 되었고, 장례식을 집례할 수도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염려하여, 당분간 설교도 하지 말고, 글도 쓰지 말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어릴 적 자신의 신앙적 용기를 시험하기 위해 난로 불 속에 손을 집어넣었던 그를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말릴 수는 없었습니다. 얀 후스 교수의 말입니다. ‘내가 설교하기를 그만 둔다면, 나는 마지막 심판 날에 죄인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결코 그럴 순 없습니다. 설령 설교를 하다가 화형을 당하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계속 설교할 것입니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습니다. 로마교황청이 그를 종교재판에 회부하고, 재판정에 출두하라는 소환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에게 내려진 죄목이었습니다. 얀 후스 교수를 소환한 죄목은, 당시 가장 무겁고, 가장 치명적이요, 해서 가장 무서운 형벌이 가해지던 이단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재판 장소가 보헤미아의 프라하가 아닌 스위스의 콘스탄스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보헤미아에서 재판을 열 경우, 그의 추종자들이 소란을 피울까 염려한 까닭이었습니다. 그의 친구들과 보헤미아의 용감한 기사들이 존 후스의 집으로 몰려와 그를 보호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얀 후스의 태도는 단호했습니다. ‘나는 스위스로 가야 합니다. 가서 내가 발견한 진리를 변호해야 합니다. 나는 스위스로 갈 것입니다.’

스위스 콘스탄스에 도착한 그는, 그 옛날 바울이 그리했던 것처럼, 거리로 달려나가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파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설교할 권리를 박탈당한, 로마교회로부터 파문당한 신부였습니다. 그런 그를 콘스탄스의 주교와 시장이 비공개적인 자리에 불렀습니다. 식사나 한번 하면서 당신의 소신을 듣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식 재판에 그를 세우기 전, 어떻게 해서든지 올가미를 씌워, 먼저 그를 투옥하려는 음모였습니다.

결국 그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주교와 시장 앞에서 이단 사설을 퍼뜨렸다는 죄목으로 체포되고 말았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절친한 귀족 친구가, 간교한 추기경과 시장에게 달려가 이는 불법이라고 항의해 보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거짓은 항상 진리를 두려워하는 법, 얀 후스 교수를 시민들과 가까이 두는 것조차 두려웠던 추기경들은, 그를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호숫가의 도미니카 수도원으로 이송했다. 비겁하게도 저들은 얀 후스를 감방에 가둘 때조차 쇠사슬을 풀어주지 않았다. 착고를 차고 지하 감방에 던져졌던 사도 바울처럼 말이다.

호숫가의 감방은 더러운 냄새와 습기와 온갖 벌레와 질병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오래지 않아 그는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그러나 잔혹한 저들은 그가 죽은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죽을 듯이 아픈 데 죽지도 못하는 처참한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얀 후스는 끊임없이 공식재판을 요청했다. 그러나 저들은 이단자와의 모든 대화를 금지한다는 명목으로 재판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외롭고 처참한 겨울은 깊어만 가고 있었다.

그래도 얀 후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를 위로하러 오는 동료 신부들에게, “나는 내 양심에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고 내 조국으로 돌아갈 것입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어렵사리 구한 종이에는 이렇게 글을 적어 고국으로 보냈다. “사랑하는 나의 보헤미아 동포들이여!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오, 나는 주님의 말씀을 위하여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게 겨울이 가고 드디어 봄이 왔다. 마침내 얀 후스 교수에게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일말의 기대를 안고 재판정에 나간 그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그를 고소한 세 명의 고소인들이었다. 한 때 가장 절친했던 친구 셋이 거기 고소인으로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저들은 이미 많은 액수의 돈에 매수되어 있었고, 높은 지위를 약속받은 상태였다. 그 재판정에서, 자신과 함께 공부하고 토론했던 내용을 인용하면서, 거꾸로 자신의 이단성을 증명하기 위해 열을 올리는 한 때의 친구들을 바라보며, 얀 후스 교수는 친구에 대한 배신감와 인간 자체에 대한 혐오감에 몸을 떨어야 했다. 세 명의 친구들과 로마 교황청의 사주를 받은 수백 명의 박사들이, 마침내 얀 후스 교수의 이단성을 연구한 결과를 가지고 마지막 논고를 하기 시작했다. 얀 후스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그를 살리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그를 찾아가 로마의 황제와 교황청이 요구하는 문서에 서명하라고 간청했다. 로마 교황청도 그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이 문서에 서명하기만 하면, 사면 복권은 물론, 앞으로 상당한 지위와 부귀를 보장하겠다고 제안해 왔다. 그 때마다 얀 후스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이렇게 기도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아버지여!” 결국 얀 후스는 죄인의 육체는 파괴되어야 한다!”는 마지막 선고를 들으면서, 화형을 언도받았다.

얀 후스를 처형하던 날, 저들은 먼저 그의 옷을 벗기고, 그의 머리를 십자가형으로 삭발한 후, 악마를 그린 종이 모자를 그의 머리에 씌웠다. 그러자 존 후스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이 쓰신 가시 면류관은 이것보다 훨씬 더 무겁고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곧 이어 장작더미 위에 세워진 십자가에 쇠줄로 묶인 얀 후스는, 자신의 몸을 태우려고 타올라오는 불길 속에서 이렇게 외쳤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옵니다!” 그렇게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따라 아버지의 나라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때가 그의 나이 마흔둘(42)이었다. 이처럼 위클리프, 얀 후스 등과 같은 위대한 선각자들의 희생과 순교가 있었기에, 이로부터 100년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공할 수 있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사실은 앞서간 사람들의 귀한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가정에서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그리고 이 나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늘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고 이기적이고 교만하게 살 것이 아니라, 늘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끌어안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겠다.

 2. 생각해 봅시다.

종교개혁의 선구자 얀 후스가 있었기에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가족의 믿음의 선구자에 대한 아름다운 신앙을 이야기해봅시다.

 

영적인 개혁과 교회의 개혁(갱신)을 위해 우리가 바로 시작해야할 일은 무엇일까요?

 

 

* 얀 후스의 사상요약

1.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다.

2. 성직자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3. 성직 매매를 금지한다.

4. 성서가 신앙과 행위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