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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및 훈련

종교개혁자(존 위클리프)

chapter 5. 종교개혁자 존 위클리프

1. 존 위클리프

수백년 동안 금단의 영역으로 지켜져 온 중세 로마 카톨릭의 폐단과 악습, 부정과 부패의 철옹성을 무너뜨리는 종교개혁은 그만큼 서구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그런데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까지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수많은 선각자들의 수고와 노고가 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중 흔히 종교개혁의 샛별이라 불리고 있는 존 위클리프’(John wyclif, 1329-1384)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1. 아름다운 청년 위클리프

종교개혁의 샛별이라 칭해지는 이 유명한 개혁자는, 1329, 영국의 북부지방 요크셔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문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지만, 그의 부모는 위클리프를 교회 일꾼으로 키울 작정으로 왕립대학인 옥스퍼드에 그를 입학시켰고 그는 벨리오 칼리지에서 특대 교비 연구생으로 공부하였다. 그의 부모는 지식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서, 위클리프는 철학과 법학 특히 교회법과 국법에 특히 많은 열정을 갖고 공부를 하게 된다. 이것은 훗날 위클리프가 국가와 종교의 자유를 위해 크게 활약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대학 시절 이미 놀라운 재능과 학식뿐만 아니라 열성 있는 신앙인으로도 명성이 높았던 위클리프는 천부적인 재능과 폭넓은 지식으로 많은 교우와 지지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위클리프는 학교에서 학과 공부를 하는 것 못지않게 열심히, 그리고 철저하게 성경을 연구함으로써 장래 종교개혁의 길을 준비하게 되는데, 철학이나 교회의 가르침에서 얻지 못했던 깨달음을 성경을 통해 얻게 된다. 이를 통해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깨닫고,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유일한 중보자임을 알게 되어,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업에 바치기로 마음먹는다. 당시의 성경은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라틴어나 고어(古語)로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을 제외하고 보통 사람들에게 성경은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때문에 성경의 수도 그리 많지 않았지만 성경이 있다 해도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영혼의 자유를 얻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위클리프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소외되고 격리된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자기가 발견한 진리를 전파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2. 오랜 금단의 영역에 파문을 일으키다

1) 교황권과의 대립

1345,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후 위클리프는 모교의 신학 교수로 초빙되어 강단에서 강의와 목회를 하게 되고 거기서 학장까지 지낸다. 위클리프는 유창한 화술과 정당한 논리, 수준 높은 열정적 강의로 명성을 얻게 되고, 많은 대학생들의 동조를 얻게 되었다. 학생들에게 진리를 너무도 성실하게 소개하였으므로 그는 복음박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당시 위클리프는 모든 합법적인 통치권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리고 지상에서의 통치 성격도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그는 1360년 대학의 학장이 되어 철학을 강의하던 중 1366년 영국 왕실의 사제로 일하게 되면서, 당시 무소불위의 권세를 휘두르고 있던 교황권의 정치적, 경제적인 수탈의 면모를 여실히 볼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되었다. 그는 왕의 특사로 교황청의 대표와 만나 영국 교회의 문제에 대해 의논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위클리프는 교황에 대한 조공제도와 각 국가에 대한 교황의 권세 남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교황의 세속적인 통치권을 반대하는 연설을 하였다. 교황이 영국 국왕에게 요구하는 조공의 불합리성과 영국에 미치는 교황의 정치적 영향의 부당성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임을 주장하였다. 당시 교황청은 프랑스의 아비뇽에 있었고 교황은 프랑스 정부 시책에 발맞추고 있었다. 그러므로 프랑스와 적대관계에 있으면서 교황청의 탐욕스런 강제 징수에 대해 불만을 느껴오던 영국인들에게 있어서 위클리프의 이러한 주장은 한여름의 시원한 소나기였다. 결국 그의 주장은 영국의 국왕과 귀족들로 하여금 똘똘 뭉쳐 교황청의 각종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게 하였다. 이처럼 위클리프는 처음에 애국적 입장에서 교황의 횡포에 항거했던 것이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종교개혁 쪽으로 관심의 폭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위클리프는 교회가 하나님께로부터 예정 받은 사람들로 구성된, 보이지 않는 공동체라는 주장을 펼쳤고, 성직자들 중에도 예정 받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교회의 법은 성경이지 교황이나 교회가 자의적으로 만든 법이 아니라고 강하게 교황의 권위에 맞섰다. 교황의 면죄권도 강하게 부정했다.

또한 위클리프는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복음정신으로 다스리도록 예정된 사람이 아니라면 교황도 적그리스도의 대리자일 수 있다고 선언하여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단정 짓기도 했다. 그리고 교황의 무오설과 사제를 통한 고해성사, 미사를 부정했고, 연옥이 있다는 주장이나 성지순례를 구원과 결부짓는 일, 성자로 세워진 위인들을 예배하는 일과 성자들의 유골을 숭배하는 일 등은 모두 비성경적인 것으로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위클리프의 이 같은 주장은 하나하나 중세 교회에 대한 치명적인 도전이었다.

그는 고의적으로 로마교회에 반대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직한 마음으로 진리에 투신하게 되자 그는 필연적으로 거짓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성경의 진리를 공부하면 할수록 더욱 로마 교황권의 오류가 분명해졌고, 따라서 그는 더욱 열렬하게 성경의 교훈을 사람들에게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중세 교회가 사람의 유전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을 보고, 그는 성경을 저버린 신부들을 담대하게 질책하였고, 성경을 백성들에게 돌려줄 것과 성경의 권위를 교회 안에서 다시 한 번 확립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위클리프는 해박한 성경 지식과 더불어, 성실하고 청빈한 삶을 통해 사람들의 존경과 신뢰를 얻었는데, 그로 인해 깨달음을 얻어 중세 교회의 불법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자신들의 종래의 신앙에 대해 반성하며 중세교회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중세교회와 교황권의 지도자들은 위클리프의 주장이나 그의 영향력이 백성들 사이에서 커가는 것에 대해 분노하기 시작하였다.

2) 승단(僧團)의 부패와 타락에 맞서

위클리프가 오랜 시일을 두고 단호한 투쟁의 대상으로 삼아 온 대표적인 악폐는 탁발승단(托鉢僧團) 제도였다. 당시 수도승들의 게으른 생활과 구걸은 사람들에게 재정적으로 막대한 손실을 주었을 뿐 아니라,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손만 벌리는 수도승들이 노동에 대한 잘못된 의식을 조장함으로써 국가 번영에 큰 장애가 되고 있었다.

그런데 교황은 수도승들에게 사람들의 자복을 듣고 용서해 주는 권세를 주어 수도승들은 그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하여 사람들이 어떠한 죄악을 고백하든지 곧 사면하여 주는 특권을 마구 행사하였고, 그 결과 부도덕과 도를 넘는 수준의 죄악까지 만연하였으며, 병자와 가난한 자들의 궁핍을 돕기 위해 쓰여져야 할 성물들은 수도승들에게로 넘어갔다. 수도승들의 훌륭한 저택과 사치스러운 식탁은 백성들의 빈곤을 더욱 극심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신을 숭상하는 일반 사람들은 그러한 수도승들을 지지하고, 교황의 절대권을 인정하고, 성인들을 숭배하고, 고해성사와 미사를 통해 종교적 의무를 완전히 다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함으로 천국에 들어가기에 넉넉한 자격을 얻게 된다고 믿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위클리프는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그같은 제도 자체가 거짓된 것이므로 폐지되어야 한다고 선포하면서 공격하자, 사람들도 차츰 주교들이 교황의 면죄부를 팔면서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과연 돈으로 죄사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 의심하게 되었고, 새로운 시각으로 성경을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위클리프가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거쳐 그의 깨달음을 전파하며 다니자 로마 교황은 대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단자를 엄중히 처단하라는 교서가 전달되어 영국에서도 그러한 자들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고 화형에 처할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 후, 로마에는 두 명의 교황이 선출되어 대립되게 되었는데, 그들은 사람들에게 절대 복종을 요구하였다. 또한 그들은 각각 자기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을 소집하여 싸움을 일으키고 온갖 투쟁과 타락 속에 교회의 분열을 조장하였다. 그러한 일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로마 카톨릭의 진상을 알려 주게 되어 종교개혁의 길을 더욱 앞당기게 된다.

3) 영역 성경의 완성

위클리프의 온 생애를 통하여 최대의 사업이라고 할 만한 것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종교 개혁 이전에는 아주 적은 부수의 성경밖에 없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극히 드물었다. 더욱이 성경이 유식한 사람들만 알 수 있는 언어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성경에 무슨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위클리프는 오류와 미신의 쇠사슬을 끊어 버리고 오랫동안 속박되어 있는 사람들이 자유를 얻기를 원했다. 그렇게 하여 드디어 위클리프는 어려운 라틴어나 고어로 되어 있던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여 내 놓았다. 영어로 된 성경은 영국 전역으로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성경이 번역되어 모든 사람들이 자국어로 된 성경을 가질 수 있는 시대가 왔다. 그로 인해 흑암의 시대는 지나가고 여명의 빛이 세상에 비추이기 시작했다.

그는 결코 꺼질 수 없는 진리의 빛을 영국 국민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는 자기의 동포들에게 성경을 줌으로 무지와 죄악의 사슬을 끊어 버리는 것 이상의 것을 줄 수 있었음을 기뻐했다. 14세기 이래 각 시대를 통하여 마치 생명수처럼 흘러내린 축복의 근원은 바로 성경이었다.

천여년 동안에 걸쳐서 확립된 교리와 관습을 절대적인 존경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교육을 받아왔지만, 위클리프 이후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이 모든 것들로부터 돌아서기 시작했다. 유일한 참 권위는 교황을 통하여 말하고 있는 교회가 아니라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위클리프의 주장은 중세 종교개혁의 서막을 울리는 힘찬 나팔소리였다.

4) 만년(晩年)의 대활동

성경이 나오게 되자 로마 카톨릭 지도자들은 당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음모를 꾸며 위클리프를 세 번이나 법정에 소환하였다. 감독들의 종교 회의에서 그의 저서를 이단이라고 선고하고, 젊은 왕을 그들 편으로 끌어들여 누구나 금지된 교리를 지지하는 자는 투옥시킬 것이라는 칙령을 반포하게 하였다.

하지만 위클리프는 국회에서 두려움 없이 교회 정치를 비판하고 교회가 시인한 무서운 악폐들을 혁신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교황권의 참람함과 타락을 폭로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주장을 철회하지도 숨기지도 않았다. 그는 두려움 없이 자신의 의견을 확신있게 주장하고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의 비난을 반박하였다.

위클리프를 법정에서 아무도 막는 자가 없었다. 위클리프는 자기가 하나님께 계속해서 충성한다면 자기의 생명이 희생당할 것이라고 각오하고 있었다. 왕과 교황과 감독들이 모두 힘을 합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그는 늦어도 수개월 후에는 틀림없이 화형에 처하게 될 것 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의 용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였다.

1384, 자기의 온 생애를 통하여 날마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담대히 진리를 옹호하던 위클리프는 어느 날 갑자기 뇌졸증으로 쓰러져서 사망하게 된다.

그러나 교황청에서는 그가 죽은 지 40여 년 후에 열린 콘스탄스 회의의 결의에 의해 위클리프의 유골을 다시 파내어 공중 앞에서 불태우고 그 재를 그 근처에 흐르고 있는 템스 강(혹자는 스위프트 강이라고도 한다) 물에 던져 버렸다.

 

* 존 위클리프의 사상요약

1. 평신도에게도 성경을 읽게 해야 한다고 주장함.

2. 성직자의 순결성과 충실성을 강조함.

3. 교황의 발언에는 잘못이 없다는 주장을 반대함.(교황무오설에 반대)

4. 교회가 존재하는데 교황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함.

5. 교회란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자들의 회중이라 정의함.

6. 화체설은 비성서적이며 불합리한 것이라 주장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