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인문주의와 종교개혁
1.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종교개혁이 일어나는데 기여한 여러 가지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르네상스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종교개혁이라는 주장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늘 나오는 이야기가 르네상스와 인문주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의 인문주의는 사실 세속주의에서부터 무신론으로 연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14~16세기의 인문주의자들은 상당한 정도로 종교적이었으며, 그들은 기독교회를 철폐하는 쪽보다도 오히려 갱신하는 쪽에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르네상스 후기의 정황에서 이러한 현상을 접하고자 한다면 ‘인문주의’라는 말의 현대적 의미를 제쳐둘 필요가 있습니다.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프랑스 용어가 보편적으로 14-15세기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문예부흥운동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고 있으나, 당시의 저술가들 사이에서는 다른 용어들-회복, 부흥, 각성, 다시 꽃을 피움-로 이 운동이 불리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왜 이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문명의 건물들과 유적들이 눈에 보이는 곳곳에 즐비했고, 당시 사상가들이 문화적으로 메마른 상태에서 생생한 자극을 주어 로마 고전문화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일에 나서게 했기 때문이다.
2) 14세기에 스콜라 신학이 왕성한 북유럽의 대학들에 비해 이탈리아에서는 14세기 내내 지적 공백이 있었는데 이러한 공백을 채운 것이 르네상스 인문주의였다.
3) 이탈리아 플로렌스 지방은 정치적 안정을 위해 공화정부를 유지했는데 자연스럽게 로마 공화정 연구가 관심을 얻게 되었고, 여기에 문학과 문화가 포함되게 되었다.
4) 이탈리아 플로렌스 지방이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리게 됨에 따라 여가생활을 창출하게 되었으며 문화와 예술에 많은 후원을 하게 되었다.
5) 동로마제국이 붕괴(1453년)되면서 헬라어를 말하던 지식인들이 서방으로 탈출해 이탈리아의 도시에 정착함으로써 헬라어 고전에 대한 흥미가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양한 요인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라는 고대 로마문명에 대한 문예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인문주의’라는 말은 19세기 1808년에 독일어‘휴마니스무스(Humanismus)’란 신조어가 헬라어와 라틴어 고전에 중점을 두는 교육형태를 가리키기 위해 맨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영어로 ‘휴머니즘’이란 용어는 조금 후에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 인문주의 운동을 해석하는데 두 가지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문주의를 고전학문과 언어학에 전념하는 운동으로 보는 견해였고, 다른 하나는 인문주의를 르네상스의 새로운 철학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인문주의에 대한 이 두 해석은 모두 나름대로의 심각한 결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1) 고전학문과 언어학
의심의 여지가 없이 르네상스 시대는 고전학문의 융성을 가져왔습니다. 헬라어와 라틴어 고전들이 원어로 널리 연구되었습니다. 인문주의는 본질적으로 고전 시대 연구에 전념하는 학문운동이라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현상만 봐서는 그렇고 왜 고전어를 연구했는지를 생각해볼 때 인문주의자들은 고전 연구를 통해 거기에서 영감을 얻고 훈련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전연구 능력과 언어학 능력은 순전히 고대의 자료들을 이용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인문주의는 그렇기에 고전학문과 언어학의 차원을 능가하는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르네상스의 새로운 철학
최근의 인문주의자들은 인문주의 운동이 스콜라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나서 르네상스의 새로운 철학을 구체화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인문주의가 플라톤주의자들에 속한 것도 아니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속한 것도 아닌 어떤 일관된 철학으로 특징지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견해에서 크리스텔러는 인문주의를 문화운동과 교육운동이라고 전제하면서도 일차적인 관심은 다양한 형태의 웅변술 향상 측면에 두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인문주의는 그 사상들의 실제적 내용보다도 사상들이 어떻게 획득되고 표현되었는가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볼 때 앞선 두 견해보다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러한 르네상스와 인문주의의 개념을 이해하고 종교개혁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2. Ad fontes - 근원으로 돌아가기
인문주의의 문학과 문화 프로그램은 ad fontes,즉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중세 암흑시대에 고전시대의 지적․예술적 영광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회에 적용할 때, ‘근원으로’라는 슬로건은 기독교의 권리증서들, 즉 교부 저술가들과 궁극적으로는, 성경으로 직접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르네상스 사상가들이 개발한 새로운 언어학적․문학적 방법들이 고전 시대의 생명력을 다시 포착하게 해줄 한 방법으로 여겨졌습니다. 기독교회는 신약성경에 묘사된 그리스도인들의 최초의 경험이 다시 재현되고 훨씬 후대의 역사로 전달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중세 시대와 결부된 기독교의 빈약한 형태가 성경 연구를 통해서 새롭고 생명력이 있으며 역동적인 형태로 바뀔 수 있을 것처럼 여겼습니다. 사도시대, 초대교회, 교회의 황금시대가 다시 한 번 현재에 실재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 ‘근원으로’라는 슬로건은 인문주의의 문예부흥운동에서 종교개혁으로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인문주의와 종교개혁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의 미친 영향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종교개혁의 두 진영, 마틴루터의 지도 아래 비텐베르크에서 전개된 종교개혁과 훌드리히 쯔빙글리의 지도 아래 취리히에서 전개된 종교개혁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두 진영의 성격이 매우 다른데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에 관한 일반적인 개념은 이 둘을 포함해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두 진영 사이에는 인문주의에 대한 매우 다른 입장 차이가 있습니다.
1) 인문주의와 스위스 종교개혁
스위스 종교개혁의 기원은 15세기초에 비엔나와 바슬레 대학에서 인문주의 집단들이 성장했던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스위스는 지리적으로 이탈리아와 가까웠으며, 16세기가 시작될 지경에는 르네상스 사상들을 북유럽에 전파하는 정보센터가 되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유럽의 많은 유명 출판사들이 스위스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식인 그룹에 훌드리히 츠빙글리가 회원이 되고 취리히의 설교자로 초빙받았을 때 ‘거듭난 기독교’의 비전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츠빙글리는 그의 위치를 이용하여 널리 인문주의 원칙들을 기초로 하고 특별히 성경과 교부들에 근거한, 교회와 사회 공동의 갱신을 비전으로 하는 개혁 프로그램을 착수시켰습니다. 그는 바슬레에서 1516년에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를 만났고, 그의 사상과 방법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가 에라스무스로부터 받은 영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① 종교가 영적이고 내면적인 어떤 것으로 이해되며, 외적 문제들은 치명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우선적인 강조점은 외적인 문제가 아닌 내적 갱신에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했습니다.
② 도덕적, 윤리적 중생과 개혁에 상당한 중요성이 부여됩니다.
③ 예수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관계성을 일차적으로 도덕적 모범에 둡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 Christi)
④ 제롬과 오리겐, 어거스틴과 같은 교부들이 중요한 자로 선정되어서 중요하게 인정받았습니다.
⑤ 종교개혁에서 일차적으로 교회의 교리보다 생활과 도덕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⑥ 종교개혁이 교육학적 혹은 교육의 과정으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과정으로서 신약성경과 초대교회 교부들의 통찰력에 근거했습니다.
츠빙글리의 초기 종교개혁은 철저하게 인문주의적이었으며 스위스 인문주의 그룹과 에라스무스의 통찰력을 끌어온 것이었습니다.
2) 인문주의와 비텐베르크의 종교개혁
1500년대 초에 독일에서 인문주의가 매우 중요한 지적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을지라도 마틴 루터에게 끼친 영향은 제한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루터는 신학자였으며, 그의 세계는 스콜라주의 사고방식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스콜라신학은 하나님의 은혜를 정당하게 다루지 못했으며, 개인이 자기의 구원을 얻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츠빙글리가 개혁이 필요한 곳은 교회도덕이라고 여겼던 반면, 루터는 교회의 신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루터와 스콜라 신학과의 논쟁이 칭의교리로 집중되었던데 비해 스위스의 종교개혁에서는 이러한 관심에 대한 어떠한 반향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문주의나 초기 스위스 종교개혁에는 루터의 교리에 대한 관심 같은 것과 실제로 병행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인문주의는 개혁을 교회의 삶과 윤리에 관한 것으로 보았고 교리에 관한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스콜라주의와 싸우기 위해 성경과 교부들을-특히 어거스틴을 가장-많이 끌어들였습니다. 그는 그 일을 위해 인문주의 편집자들이 준비해준 헬라어 신약성경 새 인쇄본과 어거스틴의 저술들을 사용했습니다. 루터는 이러한 새로운 자료들을 활용해 그의 개혁을 뒷받침할 수 있게 된 것이 실로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소유한 히브리어 지식, 어거스틴 인쇄본들, 신약성경의 헬라어 본문, 이 모든 것이 인문주의 편집자들과 교육가들에 의해서 제공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루터는 인문주의 자체에 대한 흥미는 별로 없었지만 인문주의가 제공해준 본문비평이나 언어학적 기술, 헬라어 신약성경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종교개혁을 이루는데 이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종교개혁 순례
1) 마르부르크
마르부르크(Marburg)는 독일 중부 헤센 주의 도시로 란(Lahn)강을 끼고 있습니다. 마르부르크라는 이름은 ‘경계요새’라는 뜻으로 1130년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당시 이곳은 튀링겐의 영주가 소유하였습니다. 이 도시의 초기 역사는 헝가리 태생의 성 엘리자베스와 연관이 있는데, 그녀는 1228년 바르트부르크에서 이곳으로 와서 여생을 자선사업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녀의 유해는 라인 강 유역의 금세공인조합이 만들어 바친 성골함에 넣어져서 고딕 양식의 성 엘리자베스 교회 안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종교개혁 시기에 제거되었다고 합니다. 필립-마르부르크 대학교는 1527년에 세워진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대학이며 루돌프 불트만이 교수로 재직한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마르부르크 대학 안에는 불트만의 흉상이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장소는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헤센의 필립의 소유였던 마르부르크 성입니다. 마르부르크 성은 1529년 10월 당시 영주였던 필립의 주선으로 루터파 종교개혁자들과 츠빙글리파 종교개혁자들이 모여 회담을 가지며 논쟁을 벌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 때 나온 문서가 15조항으로 이루어진 마르부르크 조항입니다. 마르부르크는 현재 인구 8만명 정도가 살고 있는 아름다운 중세풍의 도시입니다.
① 마르부르크 회담에 담긴 신학 이야기
루터는 로마가톨릭이나 급진주의자들과의 투쟁 외에, 프로테스탄트 개혁 진영 내부에서도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스위스 취리히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와의 갈등이었습니다. 갈등은 성만찬 제정의 말씀인 “이것이 내 몸이니라”는 구절의 해석을 둘러싸고 일어났습니다. 루터는 문자적으로 빵이 곧 몸이라고 해석하면서 성만찬 때에 빵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임재하신다고 주장하였고, 츠빙글리는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빵이 몸을 상징한다고 해석하면서 성만찬에서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신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양측의 주장은 팽팽하였고 결국 그 간격을 좁히지 못하였습니다. 마르부르크 회담이 끝난 후에 양측은 15개의 조항을 발표했는데, 14개의 조항에는 전적으로 일치했지만, 성만찬에서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임재하시는가를 다룬 마지막 15번째 조항에서는 합의를 보지 못한 채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 성만찬에 대한 이해
진영 |
명칭 |
내용 설명 |
로마가톨릭 |
화체설 |
사제가 성찬을 시행할 때 떡이 변화하여 몸이 된다. |
루터 |
편재설 |
성찬에서 영광과 불멸의 몸으로 여러 곳에 편재될 수 있다 |
츠빙글리 |
상징설 |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를 회상하고 기념하는 것이다. |
칼뱅 |
영적 임재설 |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있기에 영적으로 임재하는 것이다. |
② 일치와 연합의 성만찬을 지향하며
마르부르크 회담은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프로테스탄트 진영을 함께 모으려는 최초의 중요한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회담은 실패로 끝나, 종교개혁 운동에서 프로테스탄트가 루터파와 츠빙글리파로 분열하는 출발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부르크 조항은 개혁자들의 일치를 향한 열망을 보여주는 고전적인 문서로 남아 있습니다.
루터의 후예인 루터교회와 츠빙글리의 후예인 개혁교회는 1973년에 와서야 로이엔베르크 협약을 통해 서로를 말씀과 성례 안에서의 교제로 받아들이게 되었으니, 양측이 그 간격을 극복하는 데 무려 450여년이나 걸린 셈입니다. 이제는 성만찬이 원래의 의미인 일치와 연합의 성례가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5. 생각해봅시다.
1) 나의 믿음과 신앙의 성숙을 위해서 도전받고 영향을 준 사상이나 인물이 있다면?
2) 성찬식에 참여할 때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어떤 은혜를 받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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