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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및 훈련

종교개혁 세미나2(사회적 상황과 인쇄술)

chapter 2. 종교개혁의 사회적 상황과 인쇄술

1. 종교개혁의 사회적 상황

북유럽의 종교개혁은 대개 도시들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전체 65 제국도시들 가운데서 50개 이상의 도시들이 종교개혁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오직 5개 도시에서만이 이를 전적으로 거부하기로 선택하였다. 스위스에서도 종교개혁은 도시의 상황 속에서 시작되었으며, 우호조약으로 서로 연결된 베른과 바슬레와 다른 중심지들-제네바와 세인트 갈론-과 같은 연방 도시들 내부에서 공공 토론이 전개되는 과정을 통해 확산되었다. 프랑스 프로테스탄트는 단연 도시 운동으로 시작했으며, 리용, 오를레앙, 파리, 푸아티에르, 루엔과 같은 주요 도시들에 그 뿌리를 내렸다.

이러한 도시들에서 종교개혁의 성공이나 실패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요인들에 의존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15세기말과 16세기 초에 제국도시들의 시의회는 상당한 정도로 독립을 확보해 운영해가고 있었다. 사실상으로 각 도시들이 스스로를 작은 국가로 여기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며, 시의회는 정부의 기능을, 거주민들은 복종하는 국민의 기능을 맡고 있었다. 14세기말과 15세기에는 흑사병의 유행과 식량위기로 농촌인구가 대거 도시로 이주하게 되면서 사회불안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도시에서는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요소들이 종교개혁을 갈망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여러 이론들은 크게 세가지로 이야기될 수 있다. 첫째는 도시 공동체가 루터의 만인 제사장 교리에 함축된 사회적 의미를 주목해서 이것이 도시사회 안의 어떠한 전통적인 특징을 깨뜨렸으며 공동체의 일체감을 고무했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는 계급갈등에 따른 프로테스탄트의 지도층인 귀족과 상인들은 종교개혁과 제휴해야만 자신들의 사회적 입장이 유지될 수 있다고 믿었다. 셋째는 도시 공동체에 호소력을 가졌던 이신칭의론이 고해성사제도 및 가톨릭 교리가 주는 심리적 압박에서 자유롭게 했기에 큰 대중적인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 차이점이 무엇이든지간에 개혁자들은 은혜를 통한 이신칭의의 교리 선포에 공통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면죄부성자를 향한 기도 등등을 위한 신학적 필요성을 제거하거나 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감소시키려 하였다. 전체적인 도시의 통제권을 시의회가 가지고 있었기에 개혁자들과 공생적 관계 속에서 종교개혁을 이루어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종교개혁은 도시들 간의 정치적군사적상업적 갈등과 분열을 발생할 수 있었다.

 

2. 인쇄술의 중요성

근래에 이루어진 자료처리와 전달 분야의 기술발달은 현대 사회의 많은 부분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서유럽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운명을 지닌 한 가지 기술적 혁신이 종교개혁의 전야에 개발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물론 인쇄술의 혁신이다. 이것이 종교개혁에 끼친 영향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이러한 당시의 인쇄술의 발달은 지금의 인터넷을 통한 전세계가 네트워크화 된 것과 비견될 수 있을 정도의 혁신적인 일이었다.

원래 수세기 전에 중국에서 먼저 개발되었다고 할지라도, 유럽에서 최초로 인쇄된 문헌들로서 연대추정이 확실한 것은 1454년경 마인쯔에 있는 요한 구텐베르크의 인쇄소에서 나왔다. 이 동일한 인쇄소는 1456년에 라틴어 성경을 출판했다. 그 후 1457년에 이른바 마인쯔 시편 이라 불리는 책이 출판되었고, 이 책으로부터 책 표지에 인쇄업자, 인쇄장소, 출판일시를 명시하는 관습이 수립되었다. 그 기술은 독일로부터 이탈리아로 전해졌으며, 인쇄소들이 수비아코(1464)와 베니스(1469)에 세워졌으며, 캑스턴은 1476년 런던 웨스트민스터에 인쇄소를 세웠다.

인쇄술은 왜 종교개혁에 그처럼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가?

첫째, 인쇄술은 종교개혁의 홍보가 빠르고 값싸게 이루어지는 것을 뜻했다. 손으로 베끼는 지루한 과정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나아가 필사 중에 오류가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다. 일단 한 작품이 인쇄되게 되면 오류가 없는 인쇄본을 얼마든지 많이 배포할 수 있었다. 글을 읽을 수 있고 책을 살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비텐베르크나 제네바로부터 선풍을 일으키며 전해지는 새 사상들을 익힐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한 예로서 1530년대에 루터파에 관해 가장 잘 알고 있었던 자들은 학식이 있고 재정적 형편이 좋은 계층이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선동적이라 하여 금지되었던 루터의 책들은 안트워프와 입스위치를 거쳐 캠브리지로 향하는 한자무역 통로를 따라 밀수입되었다. 루터는 그의 사상을 말해주기 위해 영국을 방문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사상이 인쇄된 책에 의해서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그림1) 한자동맹 도시들>

 

 

<그림2) 중세말 도시의 발달>

영국과 프랑스에서 최초의 프로테스탄트들이 사회 상류층에서 곧잘 배출되었던 것은 이들이 독서 능력과 책값을 지불할 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슷하게 옥스퍼드보다 캠브리지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영향력이 더 컸던 것도 부분적으로는 캠브리지가 프로테스탄트 서적들을 수입해오는 대륙의 항구들에 더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째, 종교개혁은 어떠한 특정 문헌들, 곧 성경과 처음 5세기의 기독교 사상가들(교부들)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인쇄술의 발명은 즉각적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되는 데에 있어 이러한 자료들이 매우 중요한 두 가지 효과를 내게 만들었다. 첫째로 이 작품들의 보다 정확한 인쇄본을 내는 것이 가능해졌다. 예컨대 필사 때의 오류들을 없앨 수 있었다. 한 작품의 인쇄본을 필사본들과 비교하여 가장 정확도가 높은 본문을 확립하고, 신학적 성찰의 기반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15세기 말과 16세기 초에 인문주의 학자들은 편집하고 출판할 수 있을 만한 교부들의 필사본들을 찾아 유럽 도서관들을 뒤졌다. 둘째로 이러한 자료들이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광범위하게 보급될 수 있었다. 1520년대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신뢰할 만한 헬라어 신약성경이나 어거스틴의 저술들의 인쇄본을 접할 수가 있었다.

개혁자들-특히 루터와 그의 비텐베르크 동료들-에게 종교개혁의 종교사상은 성경과 어거스틴으로부터 크게 끌어온 것이었다. 인쇄술의 도래는 효과적인 판매기법과 점점 더 크게 연계되면서 이런 자료들을 정확하고 신뢰할 만하게 인쇄한 본문들이 널리 이용될 수 있게 하였으며, 그렇게 하여 이러한 사상들의 초기 발전과정과 이후의 확산과정을 촉진시켰다.

종교개혁 사상을 전파시키는데 있어 인쇄술의 중요성은 아무리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 예를 들자면 프랑스 종교개혁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을 이룬 칼빈의 기독교강요(1541)의 프랑스어 출판을 들 수 있다. 프랑스 안에서 갑자기 통일성 있는 진술로 신중하게 정당화된 급진적인 개혁 교리들이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유포되기 시작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이렇게 인쇄된 말을 통해 중개됨으로써 프랑스 교회로 밀어닥친 제네바 공습의 창끝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1545 6 23일에는 확장된 프랑스왕의 금서 목록이 출판되었다. 불어로 된 121개 목록 가운데 거의 절반이 제네바에서 인쇄된 것이었다. 파리의 서적 판매상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그들은 그 책들이 판매금지가 된다면 파산하게 될 것이라고 항의했다. 신학부 교수들에게 위험하며 불건전하다고 간주되었던 작품들을 위한 주요 시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학식 있고 부유한 평신도들이 칼빈의 종교개혁 사상을 선전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

이러한 현상들은 종교개혁이 기술혁신을 전적으로 의존했다는 뜻을 말하지는 않는다. 인쇄술이 당시의 지적 분위기 속에서 변화의 매개자가 되었던 것은 여러 증거들에 의해서 입증되고 있는데, 전반적으로 도시들이 몇몇 종교 연설가들이나 인물들에게서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 운동쪽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반드시 기억해야할 사항은 다수가 문맹이었던 상황에서 설교단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당시에 인쇄소에서 출판된 많은 책들이 설교집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3. 종교개혁 순례

1) 비텐베르크, 루터의 도시

엘베 강변에 위치한 비텐베르크(Wittenberg)는 종교개혁자 루터로 인해 온 세계 사람들이 찾는 도시가 되었다. 1502년 프리드리히가 작센 주의 주요 도시였던 비텐베르크에 대학을 세웠다. 개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루터와 멜란히톤이 교수로 부임하면서 비텐베르크 대학은 16세기 종교개혁의 요람 역할을 하였다. 비텐베르크는 95개조 조항이 게시된 성()교회, 루터가 설교했던 시립교회, 박물관이 된 루터와 멜란히톤의 집, 루터의 초상화를 그려준 루카스 크라나흐의 집, 비텐베르크 대학, 루터의 참나무 등 루터의 삶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비텐베르크 성 교회

비텐베르크의 성 교회는 현자 프리드리히 영주에 의해 1489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503년에 봉헌된 르네상스식 건물이다. 그러나 성 교회의 상징인 둥근 천장은 1511년에야 완성되었다. 성 교회에는 원래 유명한 독일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기도하는 손 )와 루카스 크라나흐 부자가 그린 제단화가 있었지만 오래 전에 분실되었다고 한다. 비텐베르크 성 교회는 종교개혁의 출발점이 된 루터의 95개 조항이 붙은 곳이며, 루터와 멜란히톤의 무덤이 있는 종교개혁의 성지와도 같다.

비텐베르크 성 교회 내부 곳곳에서 루터 문장을 발견할 수 있는데 여기서 잠시 각 문양과 색상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장미의 가운데에 있는 붉은 하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뜻한다. 그 안에 있는 검은색의 십자가는 고난과 고통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심장의 붉은색을 물들이지는 않는데 이것은 십자가가 심장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력을 주고 살아 있게 함을 의미한다. 이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흰색 장미는 기쁨과 위로와 평안을 의미하며 장미를 둘러싼 파란색은 하나님 나라인 천국을, 가장 바깥쪽의 금색은 이 모든 것의 영원성을 의미한다.

  

 

 


<루터의 장미 문장>

                                              

 <루터의 무덤>

 

<강대상>

 

<성교회 내부>

 

 

<95개조 반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