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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및 훈련

동방과 서방교회의 분열과 차이점

동방과 서방교회의 분열과 차이점

중세교회가 겪은 가장 큰 타격 중의 하나는 하나였던 교회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나누어진 사건이었다. 그동안 이단 분파들이 전체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간 일들이 있기는 했지만 전체 교회로 보았을 때는 극히 작은 일부에 불과했다. 하지만 중세기에 생긴 동서방 교회의 대분열은 교회에 크나큰 상처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동방정통교회(정교회)와 서방카톨릭교회가 분열한 때를 1054년으로 보고 있지만 사실상 상당히 오래 전부터 분열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공통점도 많았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다른 점을 지니고 있었다. 여러 가지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교회로 내려오던 교회가 분열하게 된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었다.

콘스탄틴 황제가 동쪽 국경의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겨 간 후 동방은 어느 정도 강화되었지만 서방은 약화되었다. 마침내 AD476년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되고 난 다음 서로마는 정치적 공백지가 되었다. 서로마가 정치적으로 약화된 때 로마에는 이노센트, 레오, 겔라시우스, 그레고리 등과 같은 유능한 교황들이 등장하여 교황권을 강화시켜 나갔다. 그 후 유능한 교황이 나타나면 서방을 비롯해서 전세계 교회를 자기의 관할 아래 두기를 원했다. 하지만 동방교회의 주교들은 이것에 반대했으며 특히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는 로마 교황의 관할권 주장에 크게 반발했다. 그래서 서방교회를 교리적 이단으로 규정하여 공박함으로써 교회 분열의 시발이 되었다.

 

1.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공통점과 차이점

먼저 동방정교회와 서방카톨릭교회의 공통점부터 살펴보면 이 두 교회는 교회역사 1천년의 공통의 유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개신교(프로테스탄트)와 달리 상호 일치되는 점이 많이 있다. 우선 이들 두 교회는 개신교회와 달리 전통의 권위를 성경의 권위만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다같이 동정녀 마리아를 숭배하고 성인을 숭배하고 성인들의 성상과 유물을 숭배하는 점에서 개신교와 다르다. 또한 일곱가지 성례를 인정하고 세례는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본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믿음만큼이나 행위도 중요하다고 보고 있으며, 선행의 공적을 인정한다.(2:19읽기)지금도 그렇지만 카톨릭교인들은 선행이 구원의 요소이므로 많은 선행을 베풀고 있다.

화체설과 성례의 요소들을 신비적으로 경배하는 데 있어서도 동일하다. 죽은 자를 위한 미사와 기도도 같이 하며, 다같이 사제가 하나님의 권위로 사죄 선언을 한다. 교회 제도도 비슷하여 다같이 주교, 사제, 부제의 삼중적 제도를 인정하며 대주교, 총주교의 제도를 인정한다.

반면, 차이점도 많이 있는데, 동방교회에는 초대교회 이후 사도들이 직접 세운 교회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동방교회의 주교들은 예루살렘 교회나 안디옥 교회나 알렉산드리아 교회나, 어느 교회가 더 위대한 교회라고 내세우기보다, 교회들이 동등한 권한을 갖는다는 생각하고 있었다. 반면에 서방교회에는 사도가 세운 교회라고 주장하는 교회는 로마교회밖에 없었고 따라서 서방에서는 로마교회가 최상의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이같은 생각은 결국 서방뿐만 아니라 전세계 교회의 관할권을 주장하는 로마교황과 교회의 동등성을 주장하는 동방교회와 마찰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이런 교회 내부의 정치적 이유에 외적인 정치적 이유가 결부되었다. 로마제국은 광대한 영지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동방과 서방에 각각 황제를 두었으나 서방은 AD476년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되고 난 다음 황제가 없었으나 동방은 1453년까지 황제가 있었다. 그래서 동방교회는 항상 황제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으며 황제가 교회의 머리가 되는 이른바 황제-교황주의(Caesaropapism)' 제도 아래 있었다. 그러나 서방은 황제가 없었기 때문에 교황이 황제의 역할까지 맡음으로 인해 그 권한이 막강했다. 그래서 로마교황은 동방의 황제를 명목상의 황제로 인정해 주고 그 대신 동방교회를 자기 관할 아래 두기를 원했다. 이것은 동방교회의 반발을 사게 되고 결국 분열을 야기하게 되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신학적으로도 차이점이 있었다.

동방은 신비적이고 사색적인 반면 서방은 실제적이었다. 동방은 인간의 구원을 인간성이 신성으로 변화되는 것으로 보았으나 서방은 인간의 구원을 하나님의 용서와 하나님과 인간의 바른 관계로 보았다. 그래서 동방에서는 신성에 대한 명상이 중요했으며 서방에서는 인간에 대한 성찰이 중요했다. 그 결과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이 동방교회의 공헌이라면 인간의 죄와 은총의 역할을 다루는 죄와 은총론은 서방교회의 공헌이었다. 특히 성령과 관련하여 동방교회는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나온다는 니케아종교회의 결정을 따랐으나 서방교회는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예수)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함으로써 크게 대립하였다.

이처럼 교황권의 문제와 성령의 기원 문제가 동서방 간의 논쟁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이긴 했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차이가 있었다.

우선 동방교회에서는 주교 이상의 고위 성직자에게는 결혼을 금지했으나 하위 성직자에게는 결혼을 허용했다. 반면 서방교회는 부제 이상의 성직자들에게 결혼을 금지했다. 세례의 경우 동방교회에서는 세 번 물에 잠갔으나(침례) 서방교회에서는 한 번 물을 뿌렸다. 성찬에 있어서 동방교회는 유교병을 사용했으나 서방교회는 무교병을 사용했다. 동방교회에서는 아동에게 성찬을 주었으나 서방교회는 아동에게 성찬을 주지 않았다. 동방교회에서는 빵을 포도주에 찍어 주었으나 서방교회에서는 평신도에게는 포도주를 주지 않았다. 동방교회에서는 교회 장로들도 죽어가는 자에게 종부성사를 할 수 있었으나 서방교회는 종부성사도 성례이므로 사제가 아닌 장로들은 거행할 수 없었다. 동방교회에서는 토요일에 금식을 하지 않았으나 서방교회는 금식했다. 사순절 기간에 동방교회는 일체의 육식을 금했으나 서방교회는 우유, 버터, 치즈를 허용했다. 동방교회에서는 사제들이 수염을 길렀으나 서방교회는 수염을 깎았다.

그밖에도 동방교회는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비잔틴제국이 배경이었고 서방교회는 분열 당시 신성로마제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동방은 헬라어를 사용했으며 서방교회는 라틴어를 사용했다. 사용하는 언어의 차이는 문화적으로 큰 이질감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동방교회는 교회에서의 성상(조각상) 사용을 금하고 대신 그림(이콘) 사용을 허용했으나 서방교회는 성상 사용을 허용하였다.

동서방교회는 이런 여러 가지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며 신앙 안에서 한 공동체로 내려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동서방은 정치적, 종교적으로 이질화 되어갔다.

1053년 강력한 교황 레오9세와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 케롤라리우스가 맞부딛치게 되었다. 교황 레오9세는 클루니 수도원 운동의 영향으로 서방에서 교황권을 확립하고 난 다음 그 교황권이 동방교회에도 미치기를 바랬다. 케롤라리우스 편에서는 교황이 황제에게 접근하여 자기의 권위를 침해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동서교회를 분열시키기로 결심했다.

마침 레오9세가 동방교회 구역인 시실리와 이탈리아 남부쪽을 자기 구역으로 설정하기 위해 결혼한 성직자들을 반대하는 운동을 실시하여 결혼한 성직자를 다 쫒아내라고 명령하고 이탈리아의 헬라인들에게 라틴식 예배를 따르도록 요구했다. 그러자, 동방의 케롤라리우스 역시 콘스탄티노플과 불가리아 쪽의 라틴계 수도사들을 축출하고 수도원을 패쇄하였으며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라틴교회들에게 헬라식 예배를 따르도록 명령했고, 라틴 교회들이 이를 거부하자 패쇄령을 내렸다. 이에 레오9세는 케롤라리우스에게 원상복귀를 명했으나 불응하자 1054년 훔베르트 추기경을 콘스탄티노플에 보내어 케롤라리우스 총주교를 파문한다. 동방교회는 이에 맞서 추기경을 정죄하며 파문장을 불태우고 서방교회와 형제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최종적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이후에 동서방교회는 여러 차례 화해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다시 하나가 되지 못하고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원래 하나였던 교회가 마침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나누어지게 된 데에는 신학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정치적인 이유가 더 많았다. 다시말해 인간적인 계산과 모략과 술수가 더많이 작용했다는 뜻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이어야 하며, 이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것은 그리스도를 두 번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라는 심각한 죄의식 자체가 중세 교인들에게는 결여되어 있었다. 교회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교회를 인간들이 좌지우지 하는 가운데,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는 교회론의 결여될 때는 늘 이런 안타까운 결과를 초래하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같은 교회 분열의 안타까운 역사를 다시금 치유하시고 선한 방향으로 이끄시며, 분열된 교회들로 하여금 심각하게 자기반성을 통해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나가는데 쓰임받도록 하셨다.

교회가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라면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비록 교회 안에 가라지가 있을지라도 추수 때까지 가라지를 남겨 두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인간적인 조급한 생각과 판단으로 교회를 분열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상처입은 교회를 다시 살리시겠지만, 교회역사를 통해 볼 때, 교회를 분열시킨 장본인들은 반드시 그 책임에 대한 징벌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교회를 분열시키고 무너뜨리며 훼방하는 자를 어찌 교회의 주인되신 그분께서 그냥 내버려 두시겠는가?

교회의 분열로 인해 중세기는 더욱 깊은 흑암 속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가 건강해야 가정도 건강하고 시대도 건강하게 된다. 아무쪼록 우리 동산교회 교우들은 교회의 하나됨과 주님의 몸된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지혜롭고 은혜롭고 충성스럽게 자신의 사명을 다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